과거 검을 다루는 무사들 사이에서는 검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존재한다 믿었다. 마법이라 말하는 허상과 비슷한 맥락으로 흐르는 전설일 뿐이지만, 그중에 '심안心眼'이라는 초월의 경지에 잠시 마음이 기울었다. 한자어 뜻 그대로 마음의 눈을 뜻하는 '심안'은 검의 수련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면 이룰 수 있는 경지로, 눈을 통해 물리적으로 보지 않아도 마음에 맺히는 심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단계를 말한다. 이는 단순히 눈을 감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닌, 허상을 구별해 실체 곧 본질을 꿰뚫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나는 이 심안의 경지가 전설로 내려오는 무사들만의 경지가 아닌, 사랑을 수련하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이뤄야 하는 경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도 그 본질을 꿰뚫어야만 한다. 이를 영화 '블라인드'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후천적 시각장애를 갖게 된 맹인의 소년과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학대로 인해, 온몸에 흉터와 흰 머리칼, 잿빛의 입술을 가진 여인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눈먼 소녀는 극도로 히스테리적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잡아 먹혀버린 어둠에 공포감을 넘어 분노와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고, 주변 모두에게 이를 표출했다. 마치 자신의 어둠을 당신들도 당해 보라는 듯이 폭력적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시력을 잃은 그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해 옆에 앉혔지만, 소년은 매번 그들을 밀어내며 고함을 질렀다. 소년은 물론 그의 어머니는 점점 지쳐갔다. 그러다 어머니는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흰머리 칼을 가진 창백하다 못해 잿빛에 가까운 피부의 여인을 고용했다. 이것이 소년과 그녀의 만남이다.
여전히 히스테리적인 소년과 그를 무표정으로 제압하며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 말하는 그녀. 소년은 자신의 어둠에 올곧게 다가와 찢어 발기는 그녀의 대범함에 점점 빠져들었다. 인간은 어느 한쪽의 능력을 잃게 되면 다른 감각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그것으로 느낀 것은 잊지 않는다. 소년은 그녀를 촉감과 향, 소리로 그리며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둠에 잠식한 소년에게 닿는 유일한 햇살로, 공기로, 삶의 애정으로 피어났고, 소년은 그녀를 사랑하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웠다. 자신의 본모습을 모르는 소년의 맹목적인 사랑이.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 변할 표정과 행동, 사랑이. 그래서 소년이 천운이 닿아 다시금 시력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떠났다. 필연적인 사랑의 붕괴를 도저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지나 소년은 청년으로 성장했고, 그녀는 세월에 더 바래졌다. 그리고 소년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던 사랑으로 결국 그녀를 찾았다. 하지만 변함없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소년과 달리, 진짜가 아니라며 다시 도망치려는 그녀였다.
분명, 소년에게 있어 삶의 가장 선명했던 날은 그녀였다. 소년에게는 그녀가 없는 빛보다, 그녀가 있었던 어둠이 더 행복했다. 그녀가 사라진 뒤 실제로 마주한 빛은 추악했고, 슬펐으며 괴로움뿐이었다. 모든 날이 그녀의 목소리와 향기, 실체를 찾아 헤매는 날이었다. 그런데 어렵게 찾은 그녀는 자신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뜬 당신에게 자신은 사랑일 수 없다며, 걸음을 뒤로 돌렸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믿게 할 수 있을까. 그녀가 없던 빛은 늘 괴롭고 슬프기만 했건만. 자신의 손끝에 느껴지던 그녀의 머리칼과 얼굴, 목소리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이 세상보다 더 큰 빛인데.
"마리, 눈을 감아야 당신을 볼 수 있다면 내 발로 어둠으로 가겠어.
그로써 당신이란 빛이 곁에 머문 다면, 이 어둠은 결코 두렵지 않아.
당신과 함께한 그날들이 증명해주고 있으니까.
나는 눈을 감고 더 뚜렷하게 당신을 보겠어. 그러니 나의 빛으로,
나의 사랑으로 내 곁에 있어줘."
소년은 그녀의 머리칼처럼 휘날리는 하얀 눈과 함께, 투명하게 솟아오름 고드름의 봉우리에 스스로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아 비로소 볼 수 있었던 사랑. 하나를 잃음으로써 진정 사랑을 알고 느낄 수 있었던 소년. 나는 그가 실체를 꿰뚫을 수 있는 심안의 경지에 있었다 생각한다. 어둠에 닿았던 그는 사랑을 꿰뚫고 빛을 찾아 진정 아름다운 사람을 마음으로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지를 이루지 못한 우리는 외적인 것에 빠져 상대를 대하고, 상대마저도 그것에 빠져 스스로를 볼품없다 여겨, 사랑이라 말해야 할 감정을 뒤로 밀어 도망쳐 버리기 일 쑤였다.
놓쳐버린 것 중에는 진정 사랑이라 칭해야 할 것도 있었을 텐데, 미개한 감각으로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 시력을 버리고 영화처럼 어둠 속에서 사랑을 찾아 맺어진 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와 비슷 경험으로 심안의 경지를 잠시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바로 '이별'이다. 오래된 사랑으로 익숙함에 빠져 어느 순간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모든 감각과 모든 시간, 모든 삶이 미련이란 이름 안에 들어가 맹목적으로 그녀를 그렸을 때가 바로 '심안'의 경지다. 그 감각이야 말로 진정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랑이 어느 순간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익숙함으로 나의 일부가 되었을 때, 나의 감각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진정 사랑이라는 것을.
눈을 감아야 보이는 사랑은 지금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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