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깊어간 노인

by 전성배

시간은 깊어간다. 노년의 나이에 접어든 말수 적은 어르신의 눈빛과 어투, 그들이 나와 우리를 보며 짓는 미소에는 결코 흐른다는 뜻에 지나감을 느낄 수 없었다. 세월이 세상을 돌고 돌다 어딘가에 고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그들에게 고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과학의 영역에서 풀어낸 시간은 그저, 무엇인가를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수준까지 깎아내리기 위한 단위이며 인간의 영역에 국한된 찰나의 종잇장 같지만, 그것에 기대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우리를 완성시킬 생명의 한 절차가 아닐까 생각한다.


언젠가 케이블 티브이에서 이순재, 신구, 손숙, 박정수라는 이름의 노년의 배우 네 명이 출연한 '인생 술집'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마치 정석 마냥 내려오는 법칙 같은 것이 있는데 바로, "오디오가 비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다. 정해진 편성시간 내에 많은 재미를 주어, 시청률을 높이고 그로써 홍보효과를 통한 수익을 올려야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붕 뜨는 시간을 단 한순간도 내보낼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우스개스러운 말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프로그램이 젊고 활력 넘치는 출연진을 대동하며 정신없는 한 편의 극을 펼친다. 물론 내가 보았던 '인생 술집'이라는 프로그램 또한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던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그날 출연한 네 명의 배우들의 시간만큼은 그것을 잠시 벗어던진 듯했다.


노년의 배우 네 명과 고정 MC 네 명이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었고, 배우들은 MC의 질문에 낮은 톤으로 성실히 답변하며 때때로 MC들을 점잖은 미소로 지켜보았다. 때론 MC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그들이 고민이라 말하는 것에 자신의 말을 펼쳤는데, 그것은 정답이라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삶의 길에서 그대가 염려하는 부분을 거친 결과 나의 생각은 이러했다며, 여행자가 스스로 고개를 들어야 볼 수 있는 이정표처럼 넌지시 던질 뿐이었다. 나는 노년의 배우 네 명이 만들어낸 짧은 극을 보며, 진정한 어른을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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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스럽거나 나이를 초월한 패션 센스, 유머를 보며 혹은 여유롭고 유복한 그들의 삶을 보며 진정한 어른을 본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배우들 중 손숙이라는 인물이 말한 모났던 부분이 닳고 달아 둥그러졌다는 말에서 그것을 보았다. 과거 시장에서 한창 장사를 하던 시절, 나는 많은 어르신을 겪었다. 그들 중에는 말을 아끼고 조용히 살 물건만 사고 가시는 분이 있으신가 하면, 조금이라도 물건값을 깎거나 흠을 잡기 위해 눈을 부릅뜨시는 부담스러운 어르신도 계셨다. 이는 비단 시장에서만이 아니라, 살다가 마주치는 많은 어르신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젊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얼굴을 찡그릴 법한 이기적이고 괴팍스러운 모습을 보이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중 우리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어른신들의 모습은 결코, 유복하고 여유로운 삶에서만 나오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떠도는 세월을 자신 안에 담에 낸 어른들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스스로 뾰족했던 자신의 지난날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닳고 달아 둥그러지며 타협하고 인정하며 수긍하는 것을 알았다는 손숙, 나보다 잘난 사람을 인정하고, 조금 손해를 보는 것도 평화에 닿는 방법이라며 끊임없이 이기고 차지하려는 욕심을 버리는 용기를 말하던 이순재.


현재의 젊은 우리만 보아도 시기와 욕심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그러움과 배려를 먼저 내미는 사람이 있다. 이기심이 앞서는 사람과 이타심이 앞서는 사람. 조언이라는 껍데기에 가식과 경솔함을 담는 사람과 말을 아끼고 경청과 응원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어르신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모든 시간은 스스로 뿌려놓은 세월을 한 땀 한 땀 갈무리하며 나아간다. 그리고 이는 사람에 따라 흘려보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흐르는 시간을 내면안에 깊은 골짜기를 지어 담아 내는 이가 있다. 나는 티브이 속 그들처럼, 그저 미소를 지어주시던 어느 노년의 작가님처럼, 흐르는 시간이 돌고 돌아 자연스레 내 안에 고이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시간을 보내는 노인이 아닌, 시간이 깊어간 노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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