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가진 클리셰

by 전성배

머리에 비디오 재생기가 달린 티브이로 영화를 보던 어린 시절의 난, 참 많은 영화를 봤지만 특히 홍콩 영화만 봤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홍콩 영화에 푹 빠져있었다. 이것이 무슨 장르고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지도 모른 채로, 지금에 이르러서 다시 본다면 뻔한 스토리와 저질스러운 드립과 액션이 난무한다고 말할 만한 일부 영화까지 통틀어서 그 시절의 홍콩 영화 자체를 좋아했다. 주윤발과 주성치, 성룡, 장국영, 왕조현과 같은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들의 이름 하나 모른 채 영화 속 인물로만 생각할 만큼 무지했지만, 홍콩 영화만이 가진 특유의 바랜듯한 색감과 칙칙한 영상미에 빠졌었던 것 같다. 요즘 유튜브를 통해 옛 홍콩 영화 리뷰 영상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 감성이 마르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하다. 게다가 뻔한 이야기라 치부하던 단순함이 사실은 거기서 거기라 불리는 우리의 삶과 닮았음을 알게 되니, 이 사실은 더욱 옛 홍콩 영화를 좋아하게 만들었다.


이는 어젯저녁, 집에 도착해 운동을 하며 보았던 '가을날의 동화'라는 영화가 일러준 이야기다.


(수필 구독 신청)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리운 남자 친구와 함께 하고자, 그가 유학 중이던 미국을 가 공부를 하기 위해 수년간 돈을 모아 계획대로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렵게 재회한 그는 그녀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전했고, 헤어지자는 냉랭한 문장이 그녀의 마음을 쉼 없이 내리찍었다. 끝없는 슬픔의 날이 반복됐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의 곁에는 도박과 유흥에 빠져 가난하게 살아가지만 친절하고, 그녀를 좋아하는 꿈 있는 청년이 있었다. 술과 도박을 좋아하지만, 유쾌하고 꿈이 있는 친절한 그를 통해 그녀는 슬픔을 달래고, 웃음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이별이 만들어준 계기를 통해 점차 가까워졌다. 하나, 냉정한 현실은 끝내 그들을 잇지 못했다. 꿈이 있고 착한 성품을 가졌다 해도 방탕한 생활은 용서되지 않을뿐더러 그것이 꿈을 이뤄줄 수는 없는 법이니, 자연스레 사랑이라는 이름조차 입에 담지 못한 둘의 관계는 이별을 맞이하고 만다. 이 이별을 마주하기 전까지 그들 사이에는 끝없는 엇갈림이 끈질기게 반복됐었다.


그녀가 그를 기다리던 밤에 그는 다른 곳에 있었고, 그가 그녀를 위해 전재산을 받쳐 산 작은 선물은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옛 연인과 함께 있는 그녀의 모습에 절망하고 만다. 그리고 끝내 헤어지기 직전 둘이 주고받은 선물 상자에는 각각 시계줄과 시계 알이 담겨 있었다.


끝없는 엇갈림.

가을이 완연해진다.

영화만이 아니라 소설이나 드라마를 봐도 가슴을 애태우거나 탄식이 절로 나오는 뻔한 전개가 눈에 띈다. 그중 남녀의 관계는 거기서 거기였고, 끝없는 엇갈림이 반복되는 안타까움이 극의 순항을 도왔다. 그 사이 남녀는 엇갈림 끝에 사랑을 점철하기도 했지만, 그 못지않게 엇갈림을 끝으로 영영 이별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뻔한 전개에 빠져 불만과 불편함을 토로하면서도 결국 끝까지 둘을 지켜본다.


왜 그럴까. 진부하고 뻔한 전개를 불평하면서도 지켜보고, 이 불만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집필될까. 나는 아마도 그 이유가 우리의 삶이 몇 개의 장르와 이야기를 번가르며 비슷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클리셰라는 영화 용어가 있다. 흔히 쓰이는 소재나 이야기의 흐름을 뜻하는 말로 독자가 '예상'할 수 있을 법한 흐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데, 이를 잘 활용한다면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지만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극을 진부하고 지루하게 만들 수 있는 독이 될 수도 있기에 적절한 활용을 요한다. 그리고 이 클리셰는 영화만이 아닌 현실의 삶에서도 쓰인다.


부모의 아래 태어나 성장하며 끝없이 부모와 부딪히고, 그들의 가슴에 몇 개의 대못을 박으며 어른이 되어가던 우리. 옳고 그름은 악행과 선행만을 구별할 수 있는 단순한 말임에도, 제 멋대로 우리의 길에까지 이를 들먹이며 판단하는 시선 속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다 끝내, 어른이 되어 홀로 세상에 남겨졌던 지난날 등. 우리의 모든 날은 영화의 클리셰 같은 몇 개의 소재와 이야기가 서로 번가르며 삶으로 엮인 것이니, 우리도 모르게 이 뻔한 것에 빠져 영화가 가진 클리셰를 끝까지 지켜보는지도 모른다.



유튜브

와카레미치 instagram / YouTube

siview market / siview instagram

aq137ok@naver.com

이전 06화그리운 모든 것에는 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