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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Sep 03. 2019

감이 늙어 곶감이 되는 시간

가을과 이름을 함께 쓰는 추석이 벌써 다음 주다. 1월, 늦어도 2월이면 찾아오는 가장 추울 겨울날의 설날과 대비되는 따뜻한 계절에 귀속된 추석은, 설이 있는 겨울과 전혀 다른 위치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그 둘이 가진 공통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번잡한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적한 공기가 내려앉을 거라는 사실과, 한적했던 시골에는 어울리지 않을 소란함이 짙게 깔릴 것이란 사실이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계절에 놓인 두 개의 명절은 서로 다른 온도와 배경을 갖고 있지만, 그 맘때 구축될 세상은 한결 같이 하나의 모습을 보인 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고, 눈을 감아도 그릴 수 있는 모습인 만큼 새롭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만이 이럴까? 아니다.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설렘을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머리에 그려질 그 뻔한 풍경이 기다려진다. 


가을과 함께 가장 큰 활기를 부여받는 감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 같다. 타인이 내뿜는 기운에 나까지 동요하는 현상을 통해 확신한다. 누군가의 기대감에 동요되어 함께 기대하고, 누군가의 슬픔에 동요되어 함께 괴로워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추석과 함께 찾아오는 첫 단감이 내뿜는 기운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다. 추석을 기점으로 제철을 맞이할 감이 다가올 겨울에는 숨을 죽이고, 조금씩 말라가며 설날에는 곶감으로 한 번 더 생을 이어가는 축복에, 감은 기쁜 기운을 내뿜는다.


겨울에 한 번 숨을 죽이는 감. 

감이 드러낼 몇 개의 모습은 매년 찾아올 때마다 놀랍고, 새삼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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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이 보일 수 있는 여러 모습 중, 예를 들어 이른 추석 탓에 입을 삐쭉 내밀며 가시지 않은 초록빛으로 한탄하는 덜 익은 모습과 적당한 시기의 추석과 맞물려 나름 제 색깔을 뽐내는 모습. 추석이 지나고 몇 주를 더 보낸 뒤 등장할 반투명한 색의 연시와 함께 호황을 누릴 노란빛이 고운 단감의 모습 중 이 모든 시기를 지나,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늙은 곶감의 모습을 가장 좋아한다.


고운 색깔은 빛을 바라고, 매끄러웠던 표면은 쭈글쭈글 해지면서 과일이라는 고운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곶감은 물론 맛이 좋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곶감을 빛는 '시간'때문에 좋아한다. 이는 요즘처럼 기계와 수작업이 합심해 대량으로 껍질이 깎이고 말려지는 곶감에서는 느낄 수 없다. 오래전 할머니의 집 지붕 밑에서 말라가던 몇 개의 감에서만 느낄 수 있다.


떫은맛을 내는 감을 몇 개 추려 손수 껍질을 깎은 다음, 줄을 이용해 하나하나 엮어 바람이 사방에서 드는 지붕 밑에 걸어두면, 나머지는 시간에게 맞기던 그 시절 할머니의 곶감은 요즘처럼 특별한 방법을 요하지 않았다. 그저 멍들지 않고 고른 감을 추려 껍질을 깎아 줄에 엮는 과정에 잔잔한 집중만 있으면 되었다. 그럼 가을이 겨울에 식어감에 차가워지는 바람을 맞으면서, 초겨울의 냉한 바람에 한 번 더 고행을 마치면 감은 곶감이라는 이름으로 노년을 맞이한다. 표면에는 '시설'이라 불리는 하얀 분가루가 겨울의 눈발을 맞은 듯 옅게 깔려 있고, 살집을 찢으면 노란빛이 돌던 속살이 짙은 갈색을 띠는 곶감이 된다.

unsplash

그럼 앞서 말했 듯 시간에 의해 곶감을 좋아하게 됐다는 사실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서로 합심하여 감을 곶감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히 곶감이 빚어지는 시간처럼 우리도 그것과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며 서서히 늙어가는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닌, 곶감이 만들어지는 시간에 매료된 나의 감정처럼 우리가 감내할 시간 자체를 사랑해야 하는 운명을 말한다.


나는 결과보다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느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예를 들어 업무처럼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시돼야 하는 분야까지 결과보다 과정을 사랑한다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대체로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사람대 사람으로서 만큼은 과정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떤 관계를 유지함에 따른 나에게 주어질 결과의 긍정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 관계의 형성을 도왔던 지난 시간을 아끼고 그로써 상대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기에 난 오래된 관계에 있는 사람을 더 사랑한다.


나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함께 곶감이 되어가는 인연들이 가장 소중하다. 친구가 그렇고, 가족이 그렇고, 사랑을 말한 당신까지, 어떤 설렘 보다도 함께한 시간이 당신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시간이 감을 곶감으로 만들 듯, 관계에 주어지는 시간이 길수록 그 관계는 곶감처럼 더 깊어진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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