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성배 Mar 28. 2019

우리가 자초한 바나나의 저주

따뜻해지는 계절과 함께 겨울이 지남을 기뻐하는 목련이 꽃잎을 펼치려는 것을 보았다. 불위에 올려놓은 차가운 물이 따뜻해지며 이내 끓어오르듯, 계절은 미적지근하게 달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나 보다. 한 달을 조금 더 보내고 나면 절기상 벌써 여름이 된다고 하니, 이미 준비를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햇볕과 시끄러운 매미의 울음소리, 툭하면 쏟아지는 비는 또다시 열기로 인해 증발하기를 반복하며, 공기는 중력에 주저앉듯 무겁고 습해지는 여름. 여름은 온통 불편하고 불쾌한 것 투성이기에 아직 오지도 않은 계절에 벌써부터 불편한 마음뿐이다. 그리고 겨울은 그와 비례해 더 그립고 기다려지게 된다.


이만한 배부른 소리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우리나라 계절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한들, 여전히 계절은 굳건히 제 이름값을 하며 우리 곁을 지킨다. 반면,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어떤가. 건기와 우기로 나뉠 뿐, 우리처럼 다채로운 색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을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여름에나 잠시 겪는 고온 다습한 환경을 그들은 연중 대부분의 날에 깊이 새긴 채 살아간다. 이를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우리가 힘들고 괴롭다 하는 날은 그들에게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계절을 뚫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면서 더 나아가 세계적인 식량으로써 인정받는 바나나를 재배한다. 오늘은 그 고달픈 바나나의 이야기 그리고 바나와 평생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필리핀은 세계적인 바나나 생산지로, 전 세계의 90% 달하는 바나나 수출량을 책임지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수입되는 바나나의 90% 이상이 필리핀 산이니, 그 양은 짐작하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에 바나나를 공급하는 필리핀의 많은 남성들은 '바나나 운반꾼'으로써 평생을 보낸다.

unsplash

바나나 농장은 헤아릴 수 조차 없는 넓은 대지에서 운영되기에 대체로 도시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고, 그 마을의 남자들은 대부분 바나나 운반꾼 일을 한다. 매일 아침 농장을 향해 나가는 그들. '빠딩'이라 불리는 길쭉하고 단단한 판자에 스펀지를 덧대 천으로 누빔질 해놓은 기구를 각자 휴대한 채, 맡은 구역으로 나선다. 한 사람이 농장을 누비며 긴 칼을 이용해, 초록색의 바나나 다발이 몇 개씩 달린 줄기 하나를 잘라내면 기다리던 사람은 어깨에 빠딩을 올려 바나나를 받아낸다. (빠딩은 20~30kg 나가는 바나나의 무게가 어깨에 주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일종의 받침 역할을 한다.)


각자 바나나 줄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바나나 농장 중심부의 공중에 달린 롤러까지 가지고 나가 걸어두는 것이 그들의 업무이며, 이것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반복한다. 그 사이 뜨거운 햇볕과 습한 공기, 갈증과 풀에 베이고 긁히는 상처들은 당연한 듯 익숙해 있다.


손가락의 마디는 뒤틀리고, 어깨뼈가 주저앉아 기울어진 자세를 취하며 다니는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입을 모아 두 가지를 말할 뿐이다. 가족을 위해서 묵묵히 임할 뿐이며, 바나나를 상처 없이 잘 운반하여 포장 후 수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그들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보면, 저 정도로 바나나를 사려야 할까 의문이 들 정도다.


필리핀 농장의 바나나는 덜 익은 초록의 상태로 수확하여 세척장에 옮겨지면, 세척과 다듬는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중량에 맞춰 박스에 넣는데, 이때 선행으로 비닐에 바나나를 담아 박스에 넣고 공기를 뺀 다음 수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렇게 해야만 운송 중에 바나나가 익어버려 소비자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상품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나나는 수출국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비닐에 '에틸렌가스'를 주입하여 숙성을 촉진시키며,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 도착할 때는 노란색이 선명한 바나나로 변모한다.

unsplash

내가 바나나를 수년 째 다루며 장사를 하던 시절, 위 과정 중 에틸렌가스 주입이 누락된 채 입하된 바나나 박스 하나를 우연히 접했다. 진한 초록색의 바나나는 노랗게 익은 바나나에 비해 좀 더 가벼웠고 단단했다. 지면에 두면 자신의 무게에도 쉽게 눌리는 익은 바나나와 달리, 그것은 보다 단단해 충격을 더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필리핀의 바나나 운반꾼들은 차량을 이용하면 더 쉬울 텐데도, 쉽게 상처가 날 수 있다며 초록 바나나 줄기를 손수 어깨로 옮기는 방식을 100년 전부터 이어가고 있다. 마치 나의 생각이 안일하다 말하듯이.

 

우리에게는 과거에 귀했으나 지금은 흔하고 저렴한 바나나가 그들에게는 과거를 거슬러 오른 듯, 귀하고 비싸 쉽게 먹을 수 없는 과일이다. 세계적으로 대형 청과 업체의 박리다매를 기본으로 유통되는 바나나는, 완전식품으로써 영양가를 인정받고 세계 식량의 반열에도 이름을 올릴 만큼 유명함에도, 정작 생산지에서 만큼은 비싸서 쉽게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어쩌면 이 같은 아이러니가 세계에 퍼져, 시대를 바나나가 귀했던 과거로 역행시킬지도 모르겠다.


캐번디시의 불치병


정확히는 예견된 수순이며, 이번 세대의 차례라 말하는 것이 더 맞겠다. 우선, 캐번디시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자면 바나나의 품종 중 하나로, 바나나의 품종은 약 1천여 개에 달하지만 압도적으로 캐번디시라는 품종이 세계의 바나나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 바나나는 길쭉하면서 통통한 살과 둥그런 모양이 특징으로, 현재 우리가 접하는 품종이 거의 여기에 속한다. 그럼 어떻게 캐번디시가 세계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흔하지만, 결코 흔하지 않은 유전적 특징 때문이다. 바로, 자가 번식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강한 재생력이다. 캐번디시 바나나를 재배하는 방식은 바나나 나무에서 과실을 수확 후에, 잎과 가지를 잘라내 그 자리에 버려두면 나무가 이를 영양분 삼아 다시금 바나나를 맺는 순환적 구조로, 이는 줄기를 옮겨 심는 것만으로도 계속해서 생산해낼 수 있을 만큼의 강한 생명력 때문에 가능하다. 이 같은 특징은 당연히 같은 뿌리에서 자라는 만큼 동일한 유전적 특징을 갖기에, 살충제에 대한 반응이나 성장 속도, 그루당 열리는 바나나의 수 등 전반적인 것을 예측할 수 있어 대량 생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나무의 키가 작은 편에 속해 강한 바람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고, 살충제 살포도 용이해 여러모로 생산력에 있어 강점이 많아 전 세계 바나나 품종 중 단연 최고일 수밖에 없었다.

unsplash

하지만 이 같은 조건은 캐번디시 이전에 '그로 미셸'이라는 품종도 갖고 있었다. 아니, 더 나은 조건을 가졌었다. 그로 미셸은 캐번디시에 비해 과육이 더 부드럽고 달콤했으며, 껍질이 약해 박스에 담아 유통해야 하는 현재의 캐번디시와 달리, 껍질이 단단하고 질겨 운송에 있어서도 더 편리했다. 하지만, '파나마병' 일명 곰팡이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순식간에 사멸의 길을 걷고 말았다. 캐번디시와 마찬가지로 그로 미셸이 가진 유전적 특징이 전멸이라는 슬픈 길을 더 빨리 걷게 한 것이다.

 

그로 미셸의 유전적 특징인 자가 번식 불가로 인한, 줄기를 옮겨 심는 방식의 일률적인 생산이 그들을 죽게 했다. 특정 품종의 바나나를 죽이는 불치병이 퍼지니, 기하급수적으로 동일한 유전정보를 가진 바나나들이 맥을 못 추는 건 당연했다. 이 대사건은 불과 수십 년 전, 1950년의 일이다. 당시 대형 바나나 업체는 파나마병을 견디면서 그로 미셸을 대체할 수 있는 바나나로는 캐번디시가 유일하다 판단했고, 여러모로 그로 미셸보다 떨어졌지만, 캐번디시로 그 자리를 대체해 현재의 모습을 만들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곰팡이 병이 등장했다. 마치,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누군가의 책략처럼 캐번디시에만 치명적인 '변종 파나마병'이 발병한 것이다. 이미 2000년대에 접어들기 전에 변종 파나마병의 등장을 알았던 학자들은,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신품종을 개발하는데 지금도 전념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눈에 띄는 성과를 내건 언론을 통해서 알아본 바 호주가 유일하다.

unsplash

운명처럼 이어지는 저주 같다. 최초의 바나나는 씨가 있는 과일이었으나, 인간이 보다 편하게 먹기 위해 유전적 변이를 통해 씨를 퇴화시킴으로써 자가 생식을 차단하고, 대량 생산을 위해 줄기에 의한 생산을 앞세운 통해 이 같은 사태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바나나의 산업구조는 처음부터 위태로웠다. 단 하나라도 어긋나면 산업 전체가 무너지는 외줄 타기를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편의를 위한 인위적인 조작. 그리고 여기에 익숙해진 채 이어진 시간이 수십 년.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우리는 또다시 캐번디시를 대체할 품종 개발에 온 힘을 쏟는다. 분명 새품종은 필연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린 필연적으로 또 고민의 시간을 밟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벌은 끝없는 윤회라 말했던 누구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스스로가 살기 위해 벌인 일들이 스스로를 조여 오는 모순. 우리는 끝없이 이를 반복하겠지.



와카레미치 instagram / YouTube

siview market / siview instagram

aq137ok@naver.com       

이전 21화 애정을 상기시키는 토마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