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 미국의 <덩컨 맥두걸> 의사는 한 가지 실험에 착수한다. 바로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실험이었고, 그 방법은 죽음을 앞둔 환자의 무게를 죽기 직전과 직후에 두 차례 재는 것으로, 죽은 직후에 영혼이 몸을 떠나는 증거를 얻고자 했다. 영혼이 있다면 나름의 질량을 가질거라 생각한 듯 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환자가 죽은 직후 몸무게가 직전에 비해 약 21g이 줄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단순히 수분 증발이나 노폐물이 배출되는 것에 의한 무게 변화가 아니라 판단하며 관련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난 현재. 여전히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영혼의 존재 유무는 불가사의다.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는 영혼의 존재를 입증할 방법도 신빙성 있는 연구 결과도 찾지 못한 상태로, 망상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형편이다. 영화나 소설, 드라마, 현실 속의 심령 형상으로 누군가는 영혼의 존재를 믿고, 누군가는 이를 의심하거나 배척한다.
하지만 오늘은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 쪽에 좀 더 무게를 실고, 나아가 조금 더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볼까 한다. 그것은 <영혼의 역할>에 대해서다. 언젠가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한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 중이던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본 적이 있다.
한 연인이 있었고, 매일 사랑한다는 말로 서로의 거리와 하루의 공허를 촘촘히 채워가던 여자는 남자에게 한 가지 서운함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의 답이었다. 수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녀와 달리 그는 매번 사랑한다는 말 대신 '나도'라는 수긍의 말만 반복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여자의 서운함은 점차 실망으로 몸집이 불어갔고, 그것은 이내 실망과 분노가 되어 남자에게 던져졌다. 그런데 이 무슨 장난인지 그와중에 총을 든 괴한을 만나게 된다.
잠시후 울리는 총성.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던 남자는 그만, 괴한의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곧 장면은 죽은 남자를 끌어안은 채 끝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자의 모습을 지켜보는 제3의 시선으로 바뀌었고, 그 시선의 주인공은 총을 맞고 숨을 거둔 남자의 영혼이었다.
이후 이야기는 영혼이 되어서도 여전히 여자를 사랑하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위험에서 여자를 지키기 위해 남자가 그녀 옆에 얼마 동안 머물며 벌어지는 사건과 사랑을 하나 하나 짚으며 순항한다.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는 영혼의 실체를 믿는 이야기였고, 그중에서도 기억과 감정은 영혼에 담긴다 믿고 있었다.
나는 이 영화의 끝에서 영혼이 육체에서 행하는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연 영혼의 역할은 무엇일까. 수많은 가상의 이야기들은 영혼이 모든 기억과 감정을 끌어안고 육체를 떠난다고 말한다. 원망과 안타까움, 슬픔의 응어리를 말하는 한恨또한 영혼이 끌어안고 육체를 떠나는 감정 중 하나라고 말한다. 혼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이러한 것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라 덧붙이며, 이런 이야기들이 말하는 영혼의 거대한 가치는 육체를 껍데기라 은연중에 확신한다. 내면에 깃든 혼이 진짜 그이며, 그 혼에 모든 특별한 것이 담기는 거라고..
하지만, 의학적인 견해로는 이 같은 이야기는 정말 가상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갑론을박 중인 뇌사 상태의 화자를 사망했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라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장과 뇌의 일부가 손상되었을 시, 소실되는 기억과 성격 변화. 알츠하이머로 인한 기억력 감퇴를 보았을 때, 앞서 근거없이 기억과 감정이 혼에 담긴다고 믿는 것보다는 훨씬 신빙성있다.
자동차의 모든 기관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딱 한번 열쇠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두 번도 아닌 딱 한 번이면 되며, 이후 다음번 시동까지 열쇠는 그 역할을 상실하고 만다. 한낱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 열쇠의 역할은 화르륵 타오르는 성화의 작은 불씨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육체에 있다고 믿는 영혼도 혹시 자동차의 열쇠에 지나지 않을까? 우리의 육체를 움직이게 하기 위한 한 번의 시동과 같은. 그래서 우리의 시동이 꺼진 뒤 우리의 몸을 떠나는 것은 무엇도 갖지 못한 하나의 형상 뿐일지도 모른다.
뭐,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 같은 생각이 정답이 될 수도, 다른 생각이 정답이 될 수도 있다. 단지, 현재까지의 정황들이 지금의 주장에 좀 더 무게를 싣고 있을 뿐이다.
다만, 나는 사랑과 영혼을 믿고 싶다. 모든 것이 육체에 남는 다면 이는 정말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말로 삶을 단정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의 삶이 이유를 찾는 모험이라고, 길고 잦은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사회의 이치라 말한다. 그 말이 불변의 진리라면, 이 몸에 깃들어 함께 한 모든 이야기와 감정들은 혼이 되어서도 가지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정도는 갖고 떠날 수 있어야 살아볼 만한 삶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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