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진심을 숨기기 바빠 작가가 되었다.

by 전성배

동양화의 매력은 여백의 미美에서 나온다. 작가가 생각과 감정을 표현을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선과 색만을 남겨둔 채 군더더기를 걷어내면 비어지는 공간은 여백이 되고, 최종적 완성은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맡겨진다. 그것이 바로 동양화다. 그래서 선조들이 그려낸 그림이나 현대 사회에서 동양화를 다루는 모든 작가들의 그림은 어떻게 보면 모두, 타인의 시선 속에서 의미를 찾음으로써 진정한 완성에 도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시詩도 동양화와 궤를 같이한다. 시 또한 장황하게 활자를 펼치기보단 문장의 살을 최대한 빼내 종이를 채우니, 시는 곧 말을 걷어내는 과정이며 독자에게 읽힐 때 비로소 완성되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동양화와 시 모두 입을 다문 작가의 최소한의 표현이며, 이를 간판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우리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동양화를 그리고 시를 써내는 작가의 삶을 살고 있다. 나를 알아줄 독자를 기다린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진심을 드러내는 건 관계에 있어 독약이라 배워왔다. 진심은 곧 이기심, 욕심과 직결되는 자멸의 단어로 여겨져, 진심을 드러내는 건 대부분의 관계에서 치명적인 독이 된다 배워왔다. 그래서 이를 숨기고 겉과 속을 다르게 취해야 했고, 덕분에 유연하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부작용이 뒤따랐다. 표면적으로는 가까워 보였던 우리의 관계 이면에는 불편한 거리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한 때 이 같은 모순적인 관계에 끝없는 물음을 던졌다. 어찌 제 진심을 가리며 불편해할 수 록 더 돈독한 관계가 되는 것인지.. '돈독'이라는 단어가 이 같은 모순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본인을 위한 욕구만이 가득했던 어린 시절, 우리의 성장의 첫 번째 목표는 욕구를 줄이고 죽이며 작게 해, 그 자리에 이타심을 기르는 것이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는 세상에서 제 욕구만 분출하는 인물은 타인과 동화될 수 없었기에, 우리는 어릴 적부터 타인과 동화되기 위해 부단히 이를 학습했다. 결국 우리는 대체로 성실하고, 제 욕심보다 타인의 욕구에 말을 건네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를 두고 전혀 문제 될 것 없어 보였다. 우리 모두가 제 욕심보다 타인의 욕심에 말을 건네는 사람이 된 것이니, 종국에는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 허점이 드러났다. 본디 진심은 자신만이 오롯이 그려 내뱉을 수 있는 영역이다. 그 어떤 누가 어떤 배려를 품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해도 절대로 알아챌 수 없는 개인의 영역. 그것은 오직 당사자가 제 입을 통해 발설해야만 한다. 하지만 삶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개성을 중요시한다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여전히 일률적인 사람을 선호했고, 호기롭게 세상에 발을 내딘 미숙한 어른이었던 지난날의 나도, 어느덧 어릴 적 교육을 여실히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진정한 친구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인물이나 사랑에게도 나는 제 진심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당신도 분명, 드러낼 수 없는 진심을 품고 속앓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겠지.. 그래서 우리는 작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온전히 드러낸 내 진심이 이기심으로 비칠 것을 염려하여 화폭에는 선과 색보다 더 많은 여백을 두고, 시로 정제될 문장의 글자들을 끝없이 비워내며 수 십 수 백개의 작품을 쌓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 진심을 쉽게 들키지 않기 위해. 동시에 내 그림과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독자를 기다리면서.




작가가 전하는 건강한 농산물, 건강한 작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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