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고 싶었던 건

by 전성배

이십 대 중반이었던 11월. 가을의 막바지로 입동을 코 앞에 둔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나는 일을 마치고 경주로 향했다. 불현듯 어딘가 떠나고 싶었고, 자주 가던 부산이나 대전, 청주보다는 새로운 곳을 가는 것이 좋겠다 싶었고, 초행길은 겁이나 한 차례 가본 경주를 택했다. 마지막으로 경주를 방문했던 그때도 인천 터미널에서 비슷한 시간에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우연찮게 그날도 그때와 비슷하게 저녁의 색이 다 빠져 새카매진 밤에 인천을 떠났다. 약 네 시간이 걸리는 거리. 자정 전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버스에게 있어 평일의 밤은 쉴 수 없는 달리기였다. 버스는 숨을 고를 여유 한번 갖지 않고 밤을 달려 경주에 닿았다.


도착 직후, 한산한 경주 터미널에서 나섰을 때 주변에 빛이라곤 연약한 가로등 빛이 전부였다. 인천은 터미널이 번화가에 위치해 있어, 불이 꺼진 순간을 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지만 경주는 일찍이 불이 꺼진 뒤였다. 예약한 숙소를 가기 위해 미리 알아봐 둔 택시 기사님의 번호로 연락을 하니, 30분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답변이 왔다. 어차피 계획 없이 온 터였고 좀 걷고도 싶었기에, 흔쾌히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시간을 반으로 나눠, 15분 동안 갈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멀리 걷기 시작했다.


좁은 인도를 걷는 동안 오른편 도로에서 이따금 차량이 빠른 속도로 스쳐갔다. 지나치는 차량 불빛이 나를 비출 때마다 가로등 빛이 채 보여주지 못한 주변이 보이고, 윗 잎에 가려진 아랫 잎과 흙에는 시꺼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문득, 지난날에 방문한 경주를 떠올렸다. 언제였을까? 한 차례 방문했던 그때의 경주에서는 이처럼 나 홀로 걷고 있지 않았다. 당시 좋은 감정을 나누던 누군가와 밤이 무색하게 소란한 대화를 나누며 경주의 보문 호수를 걸었었다. 호수의 둘레 길을 천천히 도는 동안 잔잔한 음악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형형 색색의 조명 빛을 무대 삼아 서있는 나무는 각각 다른 색을 띠며 가로등을 대신하고 있었다. 자주색과 노란색, 붉은색, 파란색 등으로 빛나던 호수의 나무들. 일률적이던 고동색의 껍질과 푸른 잎사귀는 어둠에 빠진 보문 호수에서는 제 색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어둠에 수긍하며 조명을 위로 삼아 제 존재만 겨우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사람과 나는 그런 자연의 비극 속에서 눈치도 없이, 참 많은 웃음과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언젠가 나는 인간은 망각의 동물임이 슬퍼, 기억을 보존할 방법을 찾다가 기억을 장소와 시간, 사람에게 심어두는 것으로 망각을 극복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뱉은 나의 목소리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나는 경주의 밤을 걷는 동안, 이곳에 오기 전까지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의 자취를 다시금 밟을 수 있었다. 색색의 나무들, 시린 공기, 음악과 어둠에 묻혀 소리 없이 유영하는 새까만 호수까지. 이 기억을 함께 쌓았던 그 사람의 모양까지 나는 경주에 전부 남겨놓았던 모양이다.


과거를 뒤로하고 홀로 경주의 밤을 걸었던 그날, 그녀와 함께 당시의 순간이 고스란히 피어났다. 내게 있어 경주는 늘 찾아가고 싶은 곳이다. 다양한 음식점과 카페가 하나 같이 고즈넉한 한옥으로 되어 있어서도, 유서 깊은 역사가 곳곳에 즐비해 있어서도 아니라 한 때 좋았던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 자각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경주만이 아니라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던 장소들은 하나 같이 좋은 사람과 함께 했던 곳이었다. 그것이 너무 달콤했기에 때때로 그리워졌고, 때론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그곳으로 향하는 것 같다.


p.s 이 글을 보게 될 지금의 연인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 괘념치 마라. 나는 그때보다 좋아하는 장소가 더 많아졌고, 그 많아진 장소에 하나 같이 네가 있다.




작가가 전하는 건강한 농산물, 건강한 작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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