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내려앉아야 할 시간에도 여전히 새벽의 색이 남아 파랗게 질려있는 아침이었다. 원인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니 아침과 함께 새벽이 남긴 색을 모두 가져가야 할 하늘이 진득한 안개에 가려진 듯 허여멀건 한 것이 그 이유란 걸 알 수 있었다. 구름이 많을 아침일 거라 들었지만 당장이라도 비를 뿌릴 것은 먹색의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햇빛마저 뒤로 무를 거란 이야기는 없었는데···.
툭하면 오답을 일삼는 일기예보지만 부디 비 만은 내리지 않길 바라며 나는 예정대로 빈 거리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햇빛에 달궈져야 했을 공기는 여느 아침보다 더 시리게 볼을 스쳤다.
가사를 통해 정해진 사연을 이야기하는 곡보다 가사를 지니지 않은 연주곡이 더 많은 시문을 떠올리게 하듯, 소리가 없는 거리를 걸으니 저 밑에 가라앉아 평소에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까지 머리 위로 부유하며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고 난 뒤부터 혼자 있을 때면 여태 만났던 인연들을 한 번씩 떠올리곤 한다. 그것은 간혹 만나는 오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혼자의 여부와 관계없이 빈번한 횟수로 반복되는데, 어둑한 아침을 걷는 동안 계속해서 이어지던 조용한 거리도 더 많은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데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계속해서 반복하는 인연의 갈무리. 한데 그러던 중 생경한 기분에 사로 잡혀 갈무리를 잠시 멈추고 말았다.
사랑의 크기가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인연의 크기 또한 사랑과 그 뜻을 함께 한다는 건 미처 알지 못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갈무리하는 동안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간에 맺은 인연이건 그 반대의 경우건 상관없이, 그리운 사람들이 늘려 뜨려 놓은 시간의 장에서 산발적으로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는 기억할 수 있는 크기의 물리적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 있어 생경하기 그지없는 경험이었다.
열아홉 살 겨울에 취직한 첫 직장에서 만난 아버지와 같은 나이의 유쾌한 성격을 가지셨던 형님과 내 나이 스물여섯 살에 만나, 몇 번 만난 적이 없음에도 나를 위해 자신의 노하우와 자신의 사무실을 기꺼이 쓰도록 지원해주셨던 작은 회사의 대표님. 스물일곱부터 지금까지 나의 글에 진심 어린 조언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며 꾸준히 연락을 해주시는 작가님.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도 늘 먼저 연락을 해주는 동기 등. 외에도 사랑했던 이들과 몇몇의 친우들이 함께한 시간의 크기와 관계없이 산발적으로 솟아났다. 반대로 어떤 인연들은 투명한 유리막에 한 꺼풀 가려진 듯 흐릿하게 그려지다 이내 흩어지길 반복했다. 상처와 오만을 던지며 모르쇠로 등을 돌리던 이들은 대체로 그러했다.
나의 안위와 행복을 보상 없이 응원해주던 이들은 마치, 시간이란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저만치서 관조하며 그것이 우습다는 듯 선명히 떠올랐다.
마음은 물리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무한의 공간을 가졌다. 그 공간을 일구는 건 주인인 당사자 한 명의 몫이며, 공간을 일구기 위한 재료 또한 온전히 그의 두 손과 귀로 들고 들은 것들이 전부다. 마음이 가진 공간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 나는 땅을 수시로 갈아엎으며 건물을 부수고 세우는 인간의 손길에도 꿋꿋이 어딘가에 피어나는 꽃을 통해 마음이라는 공간은 대체로 꽃밭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나와 다른 결의 삶을 포갤 때마다 어떤 이는 머릿속에만 남은 채 시간이라는 안개 앞에 자욱하게 가려지던 반면, 어떤 이는 마음에 꽃 한 송이를 피워 수시로 그 향기를 뿜어내며 존재를 상기시켰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떠오르는 오래된 인연들은 모두 하나 같이 내 안에 한 송이의 꽃을 피워 고갈되지 않는 향기를 방출한다. 그리움은 행복했던 날들에서 돋아나고, 꽃을 피운 인연들은 하나같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향기를 맡으면 인연이 그리워지고, 인연이 그리워지면 이내 그가 심은 꽃의 향기가 코끝을 맴도나 보다.
사람은 누구든 누군가에게 꽃을 피워 한 평생 지워지지 않을 향기로 남을 수 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이를 잘 아는 사람은 타인에게 건네는 말의 무게 또한 잘 알고 있다. 말과 함께 행해지는 행동을 통해 상대의 마음의 밭에 거름이 되어 꽃을 피울 수도, 새벽녘의 이슬로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찰나의 기억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작가가 전하는 건강한 농산물, 건강한 작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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