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도매인분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한 글입니다. 어떠한 금전적 지원 없이 작성된 글로, 앞으로도 농부와 도매인을 가르지 않고 농산물과 얽힌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이라면 한 분이라도 더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그것이 곧 농산물 소비 촉진과 농부님들의 수익 증대에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길이라 믿습니다. 그럼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의미의 '의리義理'는 명확한 이미지를 그릴 수 있을 만큼 단순 명료하다. 동료와의 결의를 저버린 채 도피하는 자와 공동체로서 함께한 시간을 무시한 채 자신의 밥그릇만을 생각하는 자를 두고 우리는 의리가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기꺼이 자신의 이익보다 함께한 이들과의 공익을 위해 욕심을 버리는 자를 보며 우리는 의리가 있다고 말하니, 의리는 이타심과는 그 결이 다르고 약속에 의한 강제성을 띠는 것 또한 아니다. 온전히 자신의 도리와 양심을 빌어 스스로 행하는 자세라 할 수 있다.
불빛이 눈초리를 받는 새벽,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경매사의 목소리와 분주한 소음이 자욱한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만난 이만호 씨는 그런 의리義理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의미의 의리가 이제는 시대착오적인 사고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 의리를 일과 사람에 단단히 결속시킨 인물이었다.
약 30여 년 전 인천 구월의 모래내 시장이 깡시장이던 시절, 한 젊은 청년의 사회를 향한 걸음이 시장의 땅을 밟았다. 현재는 그 규모가 인천에서 가장 크다고 평가되는 모래내 시장이지만, 당시에는 농산물을 위탁 판매하는 상회들이 오밀조밀 모여 농산물 유통 업을 영위하는 작은 깡시장이었던 모래내. 그렇기에 더 열악했고 억세던 곳에서 청년의 나이는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90년 대 초 드디어 인천 구월에도 서울 가락시장에 이어 대형 농산물 도매시장이 개장하게 되었으니, 모래내 깡시장의 상인들이 구월 농산물 도매시장으로 이전하면서 자연스레 청년 이만호 씨도 구월 도매시장의 원년 멤버로서 최신의 농산물 유통 방식을 몸에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이십 대 초. 경매사로서의 직업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산지로부터 농산물 출하를 유치하고, 그것이 시장에 입하되면 경매사를 필두로 중도매인 분들이 원활히 경매에 참여하실 수 있도록 능력과 지식을 익혀 전파하는데 힘썼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후 신설되는 시장마다 저와 함께 하길 원하셨죠.
신설된 시장일수록 체계를 잡는 것이 최선의 과제였던 만큼 어린 나이에 농산물 업에 뛰어들어 능력을 쌓아가던 활기찬 청년의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천 부평의 삼산 농산물 도매시장과 안양에 이르기까지 신설되는 도매시장의 시작을 함께하며 체계를 갖추는데 부단히 애를 썼죠.
청년 이만호 씨는 인천이 본격적으로 농산물 도매시장을 운영하기 시작하며 농산물 유통의 가락을 잡아 나가던 시절의 모든 길을 함께 하며, 경력과 경험 그리고 사람을 쌓아나갔다. 그중 사람을 쌓는 '인연'에 특히 더 많은 신중과 노력, 사랑을 기울이던 삶이었다.
산지에서 농민을 만나며 작게는 한 해를, 크게는 한 생을 쏟아붓는 농민의 농산물이 좋은 값에 팔릴 수 있도록 몸과 마음으로 뛰던 경매사라는 직업은 제 생에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20여 년을 이어온 경매사라는 이름을 마지막에 일하던 도매법인의 부도로 그만 내려놓고 지금은 중도매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농민의 농산물을 판매하는 것만큼은 경매사건 중도매인이건 같으므로 지금의 시간도 제 생애 인상적인 날로 새겨지리라 믿습니다.
다만, 직접 농민을 만나고 또 좋은 농산물을 찾기 위해 산지 곳곳을 다니던 때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경매사 일을 하며 알게 된 수많은 농민분이 제게 주셨던 믿음과 신뢰에 대한 무게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일했던 날들. 지금도 그 연을 잇고 있다 보니 많은 농민분이 농산물 출하 업무를 부탁하시는데, 정중히 거절해도 되지만 지난 인연을 생각하며, 이익이 없음에도 꾸준히 출하 업무를 돕고 있습니다.
어느덧 중년이 된 그는 여전히 농산물 유통업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두 개의 도매 법인에 소속된 중도매인인 그는 남들보다 더 많은 농산물을 다루느라 두배는 더 힘에 부칠 것이 분명함에도 경매사 시절 함께한 농민들의 어려움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기꺼이 한 손을 거들고 있었다.
나는 이만호 씨와 나눈 이야기 속에서 그가 인연을 대하는 자세와 의리에 대한 마음 가짐이 꽤나 두껍고 견고하다 걸 느꼈다. 비단 농민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과 거래하는 거래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연에 그의 의리는 견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매일 새벽 수많은 농부님의 농산물이 시장에 입하됩니다. 각각의 농부님들이 각기 다른 농산물을 입하시키는 것이 아닌 각각의 농부님들이 하나의 농산물을 입하시키죠. 그래서 같은 수박이라도 적게는 수 명, 많게는 수 십 명의 농부님들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경매가 시작될 때면 중도매인들은 모두 각각의 기준으로 상품을 선별하여 낙찰을 하죠.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농산물을 낙찰한다면 품질이 획일화되어 거래처 유지와 수익 관리에 용이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와 다른 시선을 가진 더 많은 사람을 충족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거래처마다 각기 다른 요청 사항을 수용하여 그에 맞는 농산물을 낙찰하는 것에 집중하죠. 분명 많은 수고로움이 따르는 일이지만, 전적으로 거래처의 요구에 맞춰 낙찰을 하는데 노력합니다.
사업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화두는 매출에 쏠려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출을 올려야 나의 이익이 오르니 그에 따른 세금은 두 번째 문제이며, 나아가 매출은 사업을 확장시키느냐 마느냐의 결정과 사업성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된다. 하지만 매출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건 매출을 내기 위한 준비에 있다. 그 준비는 바로 매출이 되어줄 매입 즉, 상품의 확보다.
나의 기준에 부합해줄 상품의 안정적인 수급이야 말로 매출을 올리는데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다. 거름이 부족하면 작물이 잘 자라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업을 함에 있어 상품 혹은 자재의 수급처는 가장 중요한 파트너이며 동료이니 이만호 씨의 수고로움은 그들에게 든든한 동료일 것이다.
농산물 경매사는 한 발 물러서서 단순히 중도매인이 불러주는 가격만 듣고 낙찰가를 적어 농부에게 통보하는 사람이 아니다. 농부가 다 말하지 못한 작물의 강점과 품질, 사정을 대변하며 더 좋은 낙찰가를 받을 수 있도록 행동을 하는 대변인이다. 한 발 물러서는 것이 아닌 한 발 앞장서 농부의 입과 귀가 되는 사람. 그리고 동시에 중도매인의 사정을 고려하는 것 또한 잊지 않고 매 순간 농부와 중도매인 사이의 징검다리가 되어 소통을 도우니, 그들은 농부의 대리인이며 중재자라고 칭해야 마땅하다.
경매사를 내려두었지만 그 시절 몸에 밴 대리인과 중재자의 습관만큼은 내려두지 못하고 잇고 있는 이만호 씨. 그는 이제 경매사 시절을 넘어 소비자와 농부, 중도매인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생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같은 이름으로 불려도 부모(농부)에 따라 그 생김새와 맛이 천차만별이죠. 그래서 어느 날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멋진 맛과 모양으로 저와 농부님, 소비자를 만족시키지만, 어느 날은 우리 모두를 실망시키거나 어느 날은 저나 농부님만을 만족시키는 것에 그치고 말죠.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부모에 손길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생명이니까요. 이 관계에 묶여 있는 우리(농부, 중도매인, 소비자)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여 최선을 도출한다고 하지만, 늘 누군가는 부족함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더불어 책정된 가격에 불만을 토하는 목소리와 산지 사정에 따라 매일 변동되는 가격의 불안정은 농산물이 가진 숙명이며, 그에 따른 소비자의 불만조는 중도매인이 겪어야 할 운명이겠지요. 그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언제나 노력해야 하는 것 또한 중도매인의 자세 중 하나일 테고요.
그래도 희망해봅니다. 숙명이 자연스러운 이치로 받아들여지고, 생물의 사정을 인정하고 또 응원하며 소비자와 농부, 중도매인간의 투명하고 조금 더 인간미 있는 거래가 이뤄질 날을.
연일 비 소식이 끊이질 않는다. 오늘 새벽에도 어김없이 이만호 씨는 비 피해를 입을 농민의 걱정과 비로 인해 품질이 저하될 농산물, 그로 인해 한숨을 끊지 못하는 농민을 걱정하며 시장을 나선다.
"우리의 삶과 농산물 사이의 교점을 말하다"
농산물 에세이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전성배 지음
전성배 田性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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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에세이 / 2021 .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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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이면》 : 전자 수필집 / 2020 .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