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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Nov 29. 2021

전자책을 구독하고도 종이책을 산다.

갓 인쇄된 책의 표지를 연다. 미색의 모조지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코를 스친다. 그 냄새가 썩 마음에 든 나는 책을 왼손으로 고쳐 잡은 뒤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책장에 최대한 밀착시켜 책을 활처럼 휜다. 책의 표지가 왼쪽 손바닥으로 튕긴다. 이윽고 책의 탄성에 진 종이들이 표지를 따라 순차적으로 빠르게 넘어간다. 촤라락. 텁텁한 냄새가 조금 더 많이 그리고 멀리 퍼져나간다.


요즘 나는 이 종이책의 냄새를 자주 맡는다. 전자책 구독 서비스를 일 년 넘게 이용 중인 내가 종이책의 냄새를 자주 맡는다는 건 다시 말해 불필요한 지출을 일 년 넘게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자책 구독 서비스를 처음 접했을 때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패드 미니의 효용성을 찾았음에 쾌재를 불렀다. 월에 1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면 아이패드 미니는 언제 어디서든 전자책을 꺼내 읽을 수 있는 전자책 리더기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아이패드 미니와 전자책 구독 서비스의 조화는 마치 서로가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완벽했다. 덕분에 나는 지하철과 버스에서는 물론이고, 잠깐 계절을 맡으려 앉은 봄과 가을의 벤치에서도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방대한 크기의 도서관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도서관은 지독하게 변덕스럽고 취향은 수시로 바뀌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완벽하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일 년을 보내는 동안 나의 방 한 편에는 종이책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것들은 대체로 시 혹은 에세이라 불리며, 하나같이 나의 손바닥 언저리에서 노는 크기로 만들어졌다. 사람에게 가장 친숙하면서 다정한 언어로만 지어지는 것이 시와 에세이기 때문일까? 그 가녀린 언어는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기 때문에 두께는 얇게, 무게는 가볍게, 크기는 작게 즉, 손에 아주 착 감길 수 있도록 손바닥에서 노는 크기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짐작해 본다. 내가 전자책에 안주하지 못하고 기어이 종이책을 드는 이유가 거기에도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차가운 디스플레이 위에서 픽셀들이 구현하는 글자와 종이에 검정 잉크로 쓰인 글자의 다름을 생각해 본다. 그것들은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같은 이해를 돕지만, 우리의 감각 체계가 이를 인식하고 기억하는 양은 확연히 다르다. 적어도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디지털만의 획기적인 접근성과 편의성에 무한한 신뢰와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전자책에서만큼은. 정확히는 그 안의 활자에 대해선 디지털은 저조한 인식률과 기억률을 보인다. 여기서 잠깐 모두에게 묻고 싶다. 일전에 이미 찾아보았던 정보가 기억나지 않아 다시 찾아본 경험이 있는지를. 나는 그런 경험이 많다.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찾아볼 수 있게 되면서, 기억하려 애쓰는 일을 자연스레 하지 않게 되었다. 24시간 내내 휴대폰이 내 행동반경 안에 있으니 굳이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궁금하거나 떠올리고 싶으면 찾아보면 그만이니까. 물론 이런 나라도 기억하는 정보는 있기 마련이다. 다만 반복적인 훈련 끝에 머리가 아닌 몸이 기술을 기억하게 되었다던 어느 운동선수의 후일담처럼, 반복적인 검색 끝에 몸이 기억하게 된 경우에 한한다. 디지털은 편하고 가까운 나머지 그 방대함에 비해 기억되는 양은 현저히 적다. 전자책도 다르지 않다. 아무리 감동적인 이야기라도. 하다못해 한 줄의 문장조차도 쉽게 휘발되어 버린다.


한편 디지털에 귀속되어 그가 가진 모든 약점을 공유하는 전자책과 달리 물성을 가진 책은 모든 것이 반대다. 한 번의 독서와 탐색을 위해 책이란 물건은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당 책을 챙겨야 하고, 다음 이야기를 읽기 위해서는 제 손으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한 권 한 권의 부피는 얼마 안 되지만, 그 부피만큼 공간을 차지하기에 권수가 늘수록 공간 효율이 떨어지고, 이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습도와 먼지 관리는 필수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의 60평 규모의 작업실 ‘파키아키아’에는 약 2만 권의 책이 있다. 권수가 늘수록 많은 공간과 관리를 필요로 하는 책의 불편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종이책을 사는 건 그 불편이 책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나는 수십 권의 책에서 그 책을 찾아, 다시 한번 해당 문장과 이야기가 있는 페이지를 찾아 헤매야 한다. 그것은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한 이야기, 한 문장, 아니 단 한 글자를 읽더라도 최대한 온 마음을 다해 읽는 편이다. 기억하기 위해. 이 경험은 생각 이상으로 피곤하지만 동시에 황홀하다. 하물며 그것이 시와 에세이라면, 종이의 텁텁한 냄새까지 동반된다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 불편하고 긴장되는 독서를 기꺼운 마음으로 하고 싶을 정도다.


나는 앞으로도 활자에 관해서는 불필요한 지출을 기꺼이 할 생각이다. 전자책 플랫폼에서는 수시로 새로운 신간을 탐색하고, 마음에 드는 책이 있다면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 그 책의 물성을 소유할 것이다. 서점에 들른 김에 겸사겸사 플랫폼에 올라오지 않는 책들을 찾아도 보고, 책을 챙기지 못하고 외출했을 때에는 전자책으로 위안을 삼을 것이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동시에 쓰는 내게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격간隔刊 전성배 산문]의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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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 田性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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