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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Mar 14. 2022

다름 아닌 나에게

제이에게.

몇 개의 계절이 지났는지 모르겠어. 아니 계절을 가늠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몇 년이 지났는지조차 모르겠어. 다만 확실한 건 많은 시간이 지나 나는 여기에 너는 여전히 거기 어딘가에 있다는 거야. 잘 지내고 있냐고. 평안하냐고. 여전히 너의 일상에는 아주 자그마한 해악도 없는지, 여전히 넌 무해한 시간들로만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는지 궁금해. 그런 안부를 묻는 것이 주제넘게도 나는 그리 평안하지 못해. 하루가 멀다 하고 거칠고 악취나는 것들이 나의 일상에 해를 끼쳐.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그 때문이야. 너를 생각하면 나는 잠시나마 티끌만 한 해악도 없는 어떤 꿈같은 세계로 들어서거든. 거기에서 나는 너처럼 늘 확신에 차있고, 만사가 즐겁고 아름다워.


제이. 이쯤에서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지금, 다름 아닌 나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거야. 과거의 나에게. 엄밀히 말하면 나와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나에게. 이 말이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야. 나는 너이면서 네가 아니기도 해. 인간의 세포는 7년을 주기로 스러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한다고 하니까. 다시 말해 인간의 육체는 계속해서 죽고 재창조되기를 7년을 주기로 반복한다는 뜻이야. 지금의 나와 7년 전의 나는 그러므로 다른 존재인 거야. 나는 그저 죽은 세포들의 기억과 물리 정보를 전승 받아 새롭게 태어난 존재일 뿐이야. 그러니 7년을 그것도 두어 번은 더 되감아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과거의 넌 나와 명백히 다른 존재인 거지. 그래서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쓸 수 있어. 너를 그리워하면서.


여전히 과거의 어딘가에서 웃고 있을 너를 떠올리며 아주 많은 말을 이 편지에 쓰고 싶었는데,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네. 자꾸 뜻 모를 말만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중이야. 그런데 왠지 그렇게라도 이 편지를 아주 오랫동안 붙들고 있고 싶어. 너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난 그 세계에서 즐겁고 아름다운 것만을 볼 수 있으니까.


나를 닮은 제이야. 나는 이 편지를 아주 오랫동안 쓰려고 해. 그렇게 그 세계에서 한동안 즐겁고 아름다운 것만을 보려고 해. 편지를 쓴다는 소식에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느긋하게 기다려줘.


추신.

나는 너를 생각하면 좋을 꿈을 꾸는데,

너는 나를 생각하면 어떤 꿈을 꿀까. 궁금해.

이 편지가 혹여나 도착하거든 꾸밈없이 말해줘.



[ 땅과 붙어사는 사람들의 말 ]

※ 아래 채널은 전성배 작가의 비공개 수필이 연재되는 공간으로, 수익금은 집필 활동과 농가 홍보를 위해 쓰입니다.

http://naver.me/GK5rq9YA




전성배田性培 : 1991년에 태어났다. [격간隔刊 전성배 산문]의 발행인이며, 농산물을 이야기하고 농부를 인터뷰한다. 농업계 이슈에 관심이 많고, 여러 주제로 글을 쓰지만 대부분 삶의 테두리 안에 머문다. 지은 책으로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가 있다. 계속해서 우리나라 농부에게 도움이 될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문학적으로 완성도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목표이다.


aq137ok@naver.com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 농산물 에세이

@_seong_bae : 미문美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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