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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Aug 09. 2022

지나치게 아프고 슬픈 건 보지 못하는 당신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분명 장마가 끝났다고 했던 기상청의 말과 달리 장마를 방불케 하는 폭우가 연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어제와 오늘은 수마에 가까운 비가 쏟아지고 있어, 이곳 인천은 이례적으로 비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서구 쪽은 아직까지는 큰 피해가 없는 것 같지만, 미추홀구와 남동구, 중구 쪽에는 크고 작은 침수 피해 소식이 지금도 계속해서 보도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인명 피해 소식도 연달아 들려오고 있고요. 그 어떤 피해라도 목숨을 잃는 것만큼 비극적인 것은 없으니, 목숨만 살아있다면 언제든 일어설 수 있다고 말하던 당신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 목숨마저 잃은 땅 위에 희망은 없어 보여요. 이에 당신은 분명 어딘가에서 괴로워하고 있으시겠죠. 거울 뉴런이 유난히도 발달한 당신이라면.


한겨울의 추위를 밖에서 점퍼 하나로 견디던 시절에 우리는 만났습니다. 저는 과일가게의 직원이자 당신의 선배로, 당신은 까마득히 먼 후배로. 그 시절에 우리가 만난 일화는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제가 고교 시절 담임 선생님을 찾아뵌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요. 그때 그분께서 우리를 이어주었죠. 저는 스물세 살이었고, 당신은 열아홉이었습니다. 우리가 연락처를 교환한 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나름 서로 내켜 했다는 점에서 꼭 흠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가 처음 학교가 아닌 곳에서 그것도 특별한 용건도 없이 만났던 건 부평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한 카페였습니다. 이름이 ‘어린 왕자’ 아니면 ‘베스코’였던 것 같은데…. 카페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신의 차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12월의 크리마스였던 그날 짧은 청핫팬츠에 검은색 니트 그리고 코트처럼 긴 무스탕을 입고 있었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조금 촌스럽지만, 당시가 2013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요즘 말로 당신은 힙했습니다. 예뻤고, 그 나이에서 볼 수 없는 성숙함을 가졌었죠. 거기에 비대칭의 가르마를 따라 매끄럽게 내려간 긴 생머리까지. 네, 저는 지금 그때 당신에게 반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름답기보단 멋스러워서. 그 자신감에 찬 표정과 걸음걸이, 이를 실어 나르는 머리칼이 매혹적이어서.


그날부터 저는 당신을 사랑했고, 저는 얼마 안 가 이 마음을 고백했고, 당신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주었습니다. 내 생애 가장 순탄한 고백과 사랑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우리는 2년 가량 연애를 했죠? 정확히 얼마의 시간을 우리가 사랑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우리가 헤어진 뒤로 자그마치 8년이나 지났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을 했던 시간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시간을 홀로 보냈고, 저는 그만큼 나이가 들었으니까요. 다만 당신이 가진 특유의 공감 능력은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를 애도하는 날에도 나는 허기를 느꼈다>

※ 책 판매 수익금은 집필 활동과 농가 홍보를 위해 쓰입니다.


당신은 웬만하면 지나치게 슬프거나 지나치게 화나는, 지나치게 억울한 이야기를 보지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설령 허구의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이라도 말이죠. 당신은 그런 것을 목도할 때마다 힘들다고 했습니다.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괴롭고 화가 나서라는 게 이유라고 했는데요. 사실 당시 저는 그런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차피 자신의 일이 아닌데, 그것이 허구든 허구가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구태여 공감하며 왜 괴로워하는지.. 그저 당신이 예민하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었죠. 그런데 이유가 있었더군요. ‘거울 뉴런’ 때문이었습니다.


이 뉴런의 존재는 1990년대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의 신경과학 연구팀이 발견했습니다. 원숭이의 특정 행동과 특정 뉴런의 활성화 관계를 연구하는 팀이었는데, 그들은 어느 날 원숭이가 뭔가를 쥘 때 활성화되는 복측전운동피질(Ventral Premotor Cortex)이 갑자기 활성화되는 걸 발견했어요. 그때 원숭이는 뭔가를 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인간 실험자의 쥐는 행동을 보고 있던 게 전부였죠. 그런데도 원숭이의 뉴런은 타인이 손에 쥔 것을 보며 마치 자신이 쥐고 있다는 듯 반응했던 거예요. 연구팀은 이것을 거울 뉴런에 의한 반응이라고 결론지었죠. 그리고 계속된 연구 끝에 인간에게도 거울 뉴런이 있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네, 우리의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 그 안에는 과학적 사실이 있었던 거예요. 바로 거울 뉴런에 의해서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그 뉴런이 특별히 더 예민한 사람이었던 거죠?. 그래서 지나치게 슬프거나 아픈 것, 억울하고 괴로운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제가 만사에 무감했던 건 거울 뉴런이 지나치게 무뎠기 때문이고요.


수년을 지붕 하나 없는 곳에서 일을 하며 계절을 온몸으로 맞는 동안 저는 병에 걸렸었죠. 당신에게 쓰는 편지이기는 하나 정작 당신은 볼 수 없는 이 편지에서 그 병에 대해 구태여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것을 알고, 지금은 다행히 나은 것 같으니까요. 여하튼 그 시절에 저는 그 병을 얻고 모든 일을 멈추고 흘러가는 대로 살았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하던 제게 갑작스레 찾아온 여유는 저를 참 많이도 게으르게 만들었습니다. 무책임하고 원망만 하는 시간이기도 했는데요. 그러는 동안 우리의 관계도 함께 병들어 갔습니다. 당신은 괴로웠을 거예요. 사랑하는 남자가 병에 걸려서. 그것도 모자라 병과 함께하는 동안 자신을 헤치고 세상을 탓하던 저를 어찌 됐든 옆에서 지켜보며 공감해야 했던 당신은 누구보다 힘들었을 겁니다. 결국 당신은 지쳐 떠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당신이 밉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공감을 잘하는 당신이기에, 당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저를 떠나셔야 했을 겁니다. 그러니 되레 잘하셨습니다.


지금 저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공감 능력은 단련이 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인지, 이제는 저도 당신처럼 지나치게 슬프고 괴롭고 아프고 억울한 건 잘 보지 못합니다. 쉽지가 않아요. 분명 당신이 제게 남긴 잔재겠죠. 저는 오늘 참 많이 괴롭습니다.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목소리를 들어서, 그마저도 세상에 내보이지 못하고 생을 달리한 사람들의 마음이 아파서. 당신도 그러하겠죠?




전성배田性培 : 1991년에 태어났다. [격간隔刊 전성배 산문]의 발행인이며, 농산물을 이야기하고 농부를 인터뷰한다. 농업계 이슈에 관심이 많고, 여러 주제로 글을 쓰지만 대부분 삶의 테두리 안에 머문다. 지은 책으로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가 있다. 계속해서 우리나라 농부에게 도움이 될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문학적으로 완성도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목표이다.


aq137ok@naver.com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 농산물 에세이

@_seong_bae : 미문美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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