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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Jan 09. 2023

무책임한 글쓰기

함께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내 것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한다. 애장품인가 싶겠지만, 그것은 의외로 오래될수록 더 강하게 내 것이 되는 쪽이다. 사용자의 손때와 시시각각 쌓이는 공통의 추억으로 애장품은 더욱 애정 어려진다. 소유권을 잃어버리는 것은 사유, 즉 ‘생각’이 바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게 되는 쪽이다. 어떤 주제를 탐구한 뒤 글로 썼던 시간으로부터 멀리 떠나올수록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듯 생경해지고 때론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가 그때 이런 생각을 했구나.” “내가 그때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었구나.” 그저 유체 이탈자처럼 관망하며 읊조리게 된다.


지난 주말, 우연히 내 입에서 ‘밤비 신드롬’이라는 말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여인과 주고받다가 나온 말이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익숙한 말이기는 하나 뜻은 잘 기억나지 않아 검색창에 밤비 신드롬을 검색했다. 그리고 곧장 나는 부끄러워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에 다름 아닌 내가 밤비 신드롬에 대하여 썼던 글이 바로 위에 표시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사실 짐작은 간다. 아마 기억의 총량 때문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겨울에 연재했던 [격간 전성배 산문] 새겨울호에서 다뤘던 주제이기도 한 말이다. 6번째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글에서 나는 인간은 사는 동안 기억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고, 적정 용량이 다 차면 무의식적으로 오래된 기억 혹은 덜 중요한 기억부터 차례로 탈락시키며 최근 기억을 보존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나는 아직 기억하는 것이 더 많다고 했다. 반면에 살아갈 날 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나의 부모와 조부모는 잃은 기억이 더 많다고 했다.


그런 연유로 밤비 신드롬은 그저 나의 긴 글쓰기의 삶에서, 생존하기에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주제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록 까만 기억에 파묻혀 내 세상에 없는 말로 살았을 테지.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나는 안다. 이것은 결코 묵인할 수 없는 실수라는걸. 읊조릴 게 아니라 자성해야 했다.


누구든 언제든 검색만 하면 나의 글을 찾아볼 수 있는 세상이다. 여타 작가의 글을 찾아볼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해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우리들이다. 언제가 되었든 몇 번이 되었든 누군가에게 가닿아 읽히기 바라는 염원으로 글을 쓰는 우리들이다. 따라서 모든 작가는 자신의 글에 책임을 지며 살아간다. 그건 작가만의 덕목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이가 자신의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언제든 누구에게나 읽힐 수 있는 곳에 오르는 글이라면 더욱. 말도 예외는 아니다. 문장 한 줄조차 책임을 면피할 수 없으므로. 나는 문장은 고사하고 글 하나를 통째로 소우疏虞했다.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가까운 작가 한 명을 떠올리면 더욱 부끄러워진다. 그는 나보다 더 오래 글을 썼다. 글에 있어서는 나의 곱절로 성실한 인물이므로, 써낸 글도 나보다 더 많은 이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자신의 글을 모두 아는 사람이다. 언젠가 한번은 그와 우주 과학과 물리학에 대한 가벼운 담소를 나누다가, 아직 가설에 지나지 않은 다중우주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외에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우리 우주와 똑같은 우주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평행우주론으로도 이어졌다. 여기서 그는 그것이 만약 실재한다면, 다른 세상 속 나 혹은 동경하는 누군가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그런 세상 속 나 혹은 타인을 상상하며 글을 써 보는 것도 좋겠다고 말했다. 내가 한창 관련 과학에 빠져 이런저런 자료를 뒤져보며 몇 편의 글을 쓰던 중에 들은 말이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우주와 물리에 관한 여러 글을 썼었다. 우리가 가까워진 이유이다.


이 외에도 그는 쉼 없이 달려온 이들의 권태에 대하여, 그토록 미워했던 부모에게 결국 기우는 자식의 마음에 대하여 등 여러 글감을 내게 제시했고, 함께 쓰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대체로 그가 말한 글감에 호응하지 못했다. 나의 글쓰기를 곧잘 잊어버렸기에. 이런 나는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곧잘 글감을 찾아내던 능력도 잃어버렸다. 써야 할 글과 쓴 글의 경계가 모호했기에. 그가 자신 있게 글감을 말한다는 건 자신의 글쓰기를 알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물어도 썼던 글이라면, 쓰는 동안 떠올렸던 생각들을 막힘없이 술회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암만 수백 편의 글을 썼다고 해도 그가 있기에 책임을 면피할 수 없다. 설령 그가 없더라도.


글을 쓴 지 이제 6년이 되었다. 그간 나의 필력은 늘거나 줄어들기를 반복해, 오늘에 와서는 과연 조금이라도 발전했는지 의문인 상태다. 반면에 소우疏虞한 글들은 셀 수 없이 늘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이제는 큰 두려움 없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쓰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그 시절에 비해 조금 더 빨리,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소폭 발전했다고 봐도 되겠다. 여전히 긴 퇴고와 우물 안에서는 나왔으나 여전히 그 주위를 맴도는 글쓰기는 못 면했지만. 다만 걱정은 되지 않는다. 또다시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 더 넓어진 범위를 맴돌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새로운 글을 쓰는 기운만큼 썼던 글을, 정확히는 썼던 글감을 다시 쓰는 일에도 몰두하고자 한다. 이번에야말로 기억에 각인시키기 위해 그리고 더 확대된 생각들을 더하기 위해. 새로운 글을 읽기도 할 테지만, 내가 써 왔던 글을 다시 읽는 시간도 가져 볼 생각이다. 이 모두가 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글과 문장, 말에 대한 자성이다. 이번에는 밤비 신드롬이었으니, 다음은 무엇이 될까. 지금 당장 주제는 떠오르지 않지만 시간대는 분명하다. 아무 먼 과거부터 들춰 보면 되는 일.



'배우고, 가르치고, 잇기' 최재혁 설향 딸기 농부 인터뷰 4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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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과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농부와 농산물을 주로 이야기하고, 삶에 산재한 상념을 가끔 이야기한다. 생生의 목표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한 계속해서 농가를 위해 농부와 대화하고 그들의 농산물을 알리는 것이다. 그 글은 주로 밤이 비유하는 죽음의 위에서 쓰일 것이다. 조금 더 바라도 된다면 농부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도 쓰고 싶다. 당신일 수도 나일 수도 있는.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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