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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Mar 07. 2023

내가 살기 위해 죽인 것들을 생각하는 밤

지금, 동물권, 동물 복지 등 우리가 살기 위해 우리가 죽이는 것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이슬아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일찍이 비건으로 식성향을 바꾸고, 경향신문을 통해 꾸준히 환경과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그렇게 내놓은 글들을 엮은 ‘날씨와 얼굴’을 출간하면서 그의 행보는 더욱 구체적이고 공공연해졌다. 도서 사이트에 알람을 설정해 신간이 나오면 바로바로 구매할 정도로 애정 있게 지켜보는 작가이다 보니 나 또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살자고 죽이는 것들은 어떤 삶을 살다 가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약 1년 반 전에 만난 소를 키우는 농부, 손영수 씨도 내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니 동물권에서만큼은 내게 더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그다. 오늘은 그에 대해 말한다.


적지 않은 농부들과 대화를 나눴고, 그들 모두 내게 하나의 문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난봄에 만난 대저 토마토 농부인 심영호 씨는 "받은 사랑에 대한 예우"라는 문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모두가 그런 식이며 손영수 농부는 "소를 소답게"라는 다섯 음절로 기억하고 있다.


그와 나의 구체적인 대화는 나의 블로그에 전체 공개로 올라와 있으니 인터뷰의 핵심만 가져오면, 그는 결국 나 살자고 다른 생을 죽여야 한다면 최소한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들답게 살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슬아 작가가 동물권을 위해 육식을 경계하고, 비건으로 전향했던 다소 극적인 행보와는 대조적인데, 개인적으로 나는 손영수 농부의 삶을 더 지지한다. 여기서는 축산업과 환경 오염에 대한 연관성은 차치하고 동물권에만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려고 한다. 축산업이 환경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나 자료마다 그 영향의 정도를 달리 말하기 때문이다. 축산업의 환경 오염이 굉장히 심각하기에 하루빨리 배양육, 콩고기 같은 대체육이 보편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2020년 환경부 조사 결과에서 국내 온실가스 배출량(7억 2760t) 중 축산업에서 발생하는 배출량은 1.3%(940t)에 불과하다는 점을 근거로, 축산업이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는 인식은 비약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현재 배양육과 대체육의 발전 속도는 분명 하루가 다르게 빠르지만 여전히 갈 갈이 먼 상황이다. 어찌 됐든 당분간은 균형 있는 영양 섭취를 위해서라도 인간의 고기 소비는 불가피하다. 그렇기에 소와 돼지, 닭이 살아 있을 때만이라도 그들답게 살게 하다가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떠나보내야 한다는 손영수의 말이 더 현실적이고 충분히 가능한 영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소를 키우는 방식은 이렇다. 방목 사육과 조사료 급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다지 특별한 것 없는 단출한 방법 같아 보이지만, 이를 하지 못하는 농가가 태반이다. 다만 현행법상 소를 출하할 때는 반드시 등급을 받아야 하는데 현행 등급제는 마블링을 기본으로 하기에 안타깝게도 출하 수개월 전에는 곡물 사료도 급여하는 상황이다. 등급이 어느 정도 나와 줘야 그에 걸맞은 경매가를 받을 수 있을 테고, 그래야 농장을 운영할 수 있으니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보상 없는 꾸준함은 어불성설이니까. 그가 최근에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식육 매장을 오픈하고, 인터넷 판매에 뛰어든 건 이 같은 부조리를 끊어 내기 위해서다. 판로만 있다면 현행 등급제에서 얼마를 받든 자체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럼 굳이 곡물 사료를 급여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그는 보고 있다. 그가 진정 바라는, 소를 소답게 키우다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손영수 농부의 삶을 지지하는 건 이처럼 현실적이고 예우를 갖춘 방법을 아직 못 찾았기 때문이고, 그는 실제로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살기 위해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는 게 어디 인간뿐일까? 동물의 세계에서도 이는 지극히 자연적인 모습이다. 새의 새끼조차 살기 위해 어미가 물어온 지렁이를 씹어 먹는다. 매는 뱀을 사냥하고, 사자는 물소를 사냥한다. 물고기도 자신보다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하물며 초식 동물조차 살아 있다고 여겨지는 풀을 뜯어 먹는다. 혹 풀은 괜찮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생명에 경중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냐고 말하고 싶다. 생을 가진 모든 것들은 결국 타자의 생을 뺏어 자신의 생을 연장하고 있다. 이것은 생물이라면 필연적인, 그야말로 ‘생태’. 다만 인간은 달라야 한다.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 말하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인간은 설령 이것이 생물의 숙명이라 할지라도 타자에게 가여운 마음을 가져야 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사는 동안 최대한 그들답게 살게하고, 죽일 땐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는 방식. 그러라고 가진 이성일 테다. 그것이 동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사냥감을 덜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재빨리 목부터 물어뜯는 사자와 비교하면 동물만도 못한 짓을 하고 있다.


극적인 효율을 위한 공장식 밀집 사육과 그로 인한 극악의 위생 상태, 방치, 몸에 맞지 않는 곡물 사료 급여와 살집을 키우기 위한 강제 급여, 맛을 위해 채 다 자라지 못한 것들의 도축, 극단적인 효율 때문에 전염병이 한 번 터졌다 하면 순식간에 전염될 수 있기에 이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멀쩡히 살아 있는 것들을 살처분하기도 한다. 그 수가 많게는 수백만이다. 이쯤이면 탈육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이슬아 작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기에 더더욱 탈육식이 아닌 동물권을 지키기 위해 동물 복지를 주장하고 싶다. 우리 모두가 탈육식을 한다는 건, 그것만큼 이상적인 건 없으나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설령 대체육이 육식을 대신할 수 있는 날이 와도 어딘가에서는 ‘진짜 고기’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는 고기를 공급하고 이를 찾는 인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최소한 그들답게 살다가 가게 해야 하며 그러려면 손영수 같은 농부가 많아져야 한다. 그처럼 타자의 생을 가엽게 여기고,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그들답게 살 수 있도록 투자와 연구에 적극적인 농부가 많아져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렇게 동물권을 지켜서 오는 생에게 기꺼이 그에 맞는 돈을 지불할 줄 아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종국에는 그런 생만을 소비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에 자리해야 한다. ‘동물 복지’라는 이름이 붙지 않아도 동물권을 지켜서 온 것이 당연한 세상. 그런 세상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꿈이 아니다.


여기까지, 이슬아 작가와 손영수 씨가 아니었다면 생각하지 않았을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생각 없이 누군갈 죽이기만 하며 살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타자를 죽이며 산다는 건 변함없겠지만, 더 나은 죽음을 위해 나도 고민할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농산물과 생애를 함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려요. 철마다 독자님이 드시면 좋을 과일 소개와 그에 얽힌 이야기는 덤입니다.

https://naver.me/GK5rq9YA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땅과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농부와 농산물을 주로 이야기하고, 삶에 산재한 상념을 가끔 이야기한다. 생의 목표는 힘이 닿는 한 계속해서 농업을 위해 농부와 대화하고 그들의 농산물을 알리는 것이다. 그 글은 주로 밤이 비유하는 죽음의 위에서 쓰일 것이다. 조금 더 바라도 된다면 농부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도 쓰고 싶다. 당신일 수도 나일 수도 있는.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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