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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May 23. 2023

편지, 발신자와 수신자의 만남 없는 밀회

당신에게도 있겠죠. 현재적 휘말림에서 벗어나는 자신만의 방법이. 그건 때론 장소일 수도 있고 때론 어떤 행위일 수도 있으며 때론 사람일 수도 있겠습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고, 당신은 이 세 개를 전전하거나 혹은 하나에 정착해 주기적으로 현실에서 도피할 텐데요. 하나 더 확언하면, 세 개라고 말은 했지만 그 아래 개인의 답들을 집어넣으면 수를 세는 건 더 이상 무의미해진다는 겁니다. 그저 그 수많은 답들을 보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가 이렇게나 많구나”라고, 작게 입을 벌려 읊조릴 수밖에 없어지죠.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답이 몇 개든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는걸.


결국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말한다는 겁니다. 익숙한 것에 마음을 두는 성정은 개인의 것이 아닌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본능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마음을 두고 있는 건 농산물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걸 바라보며 어떤 상상을 하는 거예요.


농산물이라는 작은 생이 인간에게로 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영원’을 시작으로, 내가 우주를 보며 변방의 먼지만 한 행성에 사는 나 자신을 하찮게 보듯 농산물도 인간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우습기도 한 상상을 합니다. 그런 우주만 한 상상을 하다가 그럼에도 나는 존재하고, 농산물은 계속해서 살고 죽기를 반복한다는 현실을 되새기는 것. 농산물을 바라보며 저는 이런 우주만 한 상상을 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어느 날 문득 그게 참 고마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농산물은 저를 돈 벌게 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피난처도 되어 주어 저를 더 살게 합니다. 하지만 이 고마움을 단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농업계의 현황, 농산물을 기르는 농부, 농산물을 먹는 사람, 농산물이란 카테고리에 속한 작물들의 역사 등등 참 많은 걸 썼지만, 정작 농산물을 향해서는 써 본 일이 없더군요.


그래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수신자는 ‘농산물’. 이 편지의 전문은 밑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편지란 자고로 발신자와 수신자의 만남 없는 밀회. 밀지로도 바꿔 써도 무방할 텐데요. 이번만큼은 농산물과 저의 밀회를 당신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수신자는 농산물입니다>

"당신 앞에서 이런 우주만 한 상상을 하는 게 현재적 휘말림을 벗어나는 저만의 방법이었던 겁니다."

https://naver.me/FWPZtLgJ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땅과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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