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6년이다.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 만나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내 나이가 적지 않아 그전에도 긴 연애를 몇 번 해 본 적 있다. 모두 연하였고, 나보다 서너 살 어렸다. 그들과 적게는 일 년에서, 많게는 일 년 반을 만났다. 헤어진 이유는 짐작건대 내 쪽에 있을 것이다. 너무 오래됐고, 나리와의 추억이 또 너무 방대해서 잘 생각나지 않지만 확실하다. 나는 주로 차이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차이는 쪽의 이별은 아주 구질구질하다. 더 잘하겠다고, 돌아와 달라고, 미안하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는 식의 멘트를 돌림 노래처럼 부르며 떠난 사람을 잡는다. 연인은 달라도 잡는 멘트는 똑같았던 것이다. 그럼, 운이 좋은 건지 연애가 다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재회에 성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결국에는 다시 헤어지게 되었지만. 한 번 금이 간 사이는 제아무리 잘 이어 붙여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몇 명을 만나 사랑하든 첫 이별은 아주 힘들고 재회 후의 이별은 제법 견딜 만하다. 이 사람과의 이별이 얼마나 힘든지를 몸소 체험한 뒤에 이별의 이유였던 걸 최대한 고치고, 없애고, 빌며 만났으니 두 번째 이별에 후회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야말로 최선을 다한 것일 테니. 설령 있다고 해도 다시 그 사람을 잡을 정도는, 그 사람에게 잡힐 정도는 되지 않을 것이다. 재회는 어쩌면 확실한 이별을 위한 숨은 이별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리와 6년을 만나면서, 이제는 우리의 사랑이 영원으로 승화된 것처럼 여겨져서, 요즘은 우리에게 이별이란 행위가 아득해졌음을 느낀다. 우리는 지금 여생, 이별은 죽음에 의한 것이 아닌 이상 영원히 함께일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나리와의 이별을 상상한다. 나리에게 서운한 일이 있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거나 소원해지는 느낌이 들 때 그렇다. 이별을 상상하면 나리를 조금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사랑에는 만난 기간이 중요하지 않고, 이별의 슬픔도 만난 기간에 비례하지 않는다지만, 오래 사랑한 이들의 이별은 어떤 이별보다 슬플 것이다. 나리와 헤어지면 나는 생애 가장 크고 긴 고통을 겪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 거대한 슬픔을 상상하는 건 역시 심신에 좋지 못하다. 기력을 많이 쓰게 되고, 절로 기분도 다운된다. 그럴 시간에 글 하나, 사랑 하나를 더 쓰고 말하는 게 이로울 테다. 하지만 나는 변태적인 성미를 지닌 건지, 상상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MBTI가 ‘N’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주 잠깐 상상의 나래를 제대로 한 번 펼쳐 본다.
나리와 사랑하는 동안 SNS는 풋풋하다가 능글맞아졌다. 연애 초기에 SNS는 뭔가 싸이월드의 연장선처럼 적나라한 일상을 공유하고 대화하고, 그러다가 종종 센치했는데, 요즘은 자기 자랑, 광고, 선정적인 이미지, 정치질로 판친다. 글쟁이로서 자기 홍보를 위해 억지로 SNS를 하고는 있지만, 마음 같아선 기질대로 다 삭제하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는 자세로 살고 싶다. 말이 그렇지 진짜 산은 아니겠지만.
SNS가 일상을 나눈다는 본연의 기능을 뒤로 한 채, 자기 자랑, 광고, 섹스 어필, 정치로 도배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의 추억이 건재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전히 우리는 휴대폰 카메라로 남긴 순간들 중 가장 보기 좋게 남은 순간을 골라 SNS에 올린다. 우리처럼 보기 좋은 순간들을 공유한 친구들의 게시물을 본다. 팔로워가 좋아하는 게시물 중 우연히 나와 코드가 맞는 건 나의 피드에 뜨기도 한다. 그게 뭐든 나랑 관련이 있다면. 그렇게 뜨다 보면 나와 과거에 연을 둔 사람의 소식도 무방비로 목격하곤 한다. 과거의 나는 결코 무감하게 볼 수 없는 게시물이다.
나리를 만나기 전이라면 내가 지금처럼 글을 쓰지 않던 시절이다. 지금처럼 글 때문에 고뇌하지도, 내 부족한 솜씨를 어떻게든 채우려 사랑하는 작가들의 책을 무작정 읽지도 않던 시절, 과일이 잘 팔리기만을 염원할 뿐인. 아주 어리고 호기롭고 당돌하기만 했을 뿐인 그때 나는 SNS도 지금처럼 하지 않았다. 뭐 지금도 활발하게 하는 건 아니다. 가뭄에 콩 나듯 게시물을 올리고 있어 사실상 자기 홍보를 위해 SNS를 한다던 말이 무색하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SNS를 하지 않았다. 싸이월드가 힘을 잃을 때쯤 내 일상 공유의 흥미도 함께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 시절에 나는 내가 만나고 헤어진 연인들을 조금 더 빨리 잊을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헤어진 뒤에 한동안 그 사람이 눈앞에 아른거려도 실제로는 보이지 않으니 조금 더 빨리 마음놓고 잊을 수 있었다. 헤어지고 긴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센치해져 야밤에 연락하는 일도 없었다. 연락처를 외우지 않기로 한 때부터 가능해진 일이다.
헤어진 뒤에 더 이상 구질구질해지고 싶지 않아서, 어느 순간부터 연애할 때 상대의 연락처를 외우지 않게 되었다. 의식적으로 연인의 번호를 보지 않았고, 전화를 할 일이 있으면 전화번호부에 들어가 이름을 검색해서 했다. 연인이 행여 이 사실을 알고 서운해해도 갖은 핑계를 대며 악착같이 외우지 않았다. 번호 안 외우기가 구질구질해지지 않는 법으로 연결될 수 있는 건 나의 이별 방법에 있다. 나는 헤어지면 그 사람과 함께했던 사진을 포함한 모든 기록을 폐기한다.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생각날 법한 물건까지도 처분할 수 있는 한 모두 처분한다. 그럼 SNS를 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가 생각이 나도 추억할 건덕지도, 연락할 방법도, 소식을 접할 방법도 없으니, 그가 내게 먼저 연락하지 않는 한 나는 이러나저러나 그를 잊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거의 뭐 불가능 이별 법이다. 세상은 예전보다 더 SNS 친화적이게 되었다. 계정을 갖고만 있거나 나처럼 간헐적으로만 게시물을 올리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젊은이들 모두가 SNS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고작 전화번호 하나 외우지 않는 걸로는 내 세상에서 헤어진 연인을 지울 수 없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느 때고 연인의 소식을 볼 수 있다. DM도 할 수 있다. 야밤에 잘 지내냐는 메시지를 해 후회막심해 할 수 있다. 아날로그적으로 이별하던 나는 첨단적으로 이별하는 세상을 보고 놀라워하는 중이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나리랑 헤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만나고 2년이 될 때쯤 나리의 번호를 자연스레 외우고 말았다. 연애가 이 정도로 길어지니, 나리 세상과 내 세상은 이제 제3의 세상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거기에는 ‘나리성배’라는 네 글자 이름의 중성인이 살고 있다. 두 명의 엄마와 두 명의 형제가 그의 가족이다. 나리 세상의 나리와 성배 세상의 성배는 이제 각자의 세상은 뒷전이다. 나리성배에 적극적으로 동화되어 살아가는 중이다. 이제 나리와 성배가 헤어지는 일은 창조된 세상 하나의 붕괴를 불러온다. 둘의 이별은 이제 우주급 멸망으로 분류된 것. 그렇기에 도무지 나리와의 이별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우주급의 멸망을 본 적 없기에.
요즘 같은 첨단적인 세상에서 나리와 이별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을 하다가 나는 결국 포기하기로 한다. 아날로그적 이별밖에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나리와 헤어지지 않길 바라며 오늘도 덜 화내고, 빨리 용서하고, 덜 잘못하고, 더 사랑하기로 한다. 첨단적인 세상에 나리가 나를 버려두지 않길 바라며.
2023년, 전성배의 새로운 산문집
<이름이 없어도 살아지겠지만>
"설령 같은 이름으로 같은 인생을 산다 해도 역시나 세상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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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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