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성배 Nov 19. 2023

이 편지의 주제는 '감귤에게로 도피'가 좋겠습니다.

서간문

나를 살게 하는 당신, 잘 지내고 계시나요. 살고 죽기를 반복하는 당신께, 한 명이면서 동시에 여러 명인 당신께 안부를 묻는 게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힘주어 묻습니다. 수시로 생사를 오가는 당신이지만 반드시 삶의 어느 한 순간에는 피고 지고 자라 결실이 되시니 이상할 건 또 없겠지요.


그간 당신을 주제로 수많은 글을 썼습니다. 당신을 기르는 사람과 당신을 취하는 사람 그리고 당신 안에 속한 개개인을 주제로 하는 글까지. 이 글은 비유하자면 '인간’이란 총체적 명칭에 속한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글과 비슷합니다. 여하튼 당신과 얽힌 거의 모든 걸 주제로 삼았고, 당신을 길러 주신 분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긴 서간문을 몇 편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당신에게 쓰듯. 저는 처음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중입니다.


지난겨울 제주에 또 한 번 다녀왔습니다. 2017년에 처음 방문한 이후로 약 5년 만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1박 2일의 일정이었고, 수많은 당신 중 한 명을 보고 왔습니다. 그쪽에 계신 당신도 여전히 그대로시더군요. 기별도 없이 찾았는데도. 한반도에 골고루 불어야 할 바람이 제주로 다 몰려오기라도 한 듯 유난히 바람이 거세게 불던 날이었습니다. 행여 당신이 온전치 않을까 우려했는데 역시 기우였습니다. 여전히 건강하게 잘 빛나시고 바람에 흔들리고 계셨습니다. 사실 그대로일 거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제주에 있는 당신도 늘 생사를 오가는 분이시니.


이번에 제주를 찾은 데에 이전과 같은 이유는 없었습니다. 처음 방문했을 땐 귤 농부를 만나기 위해서였어요. 귤의 품위를 확인하고, 농부와 대화를 나누고, 가격을 결정한 뒤 그날 저녁에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스물일곱 생애 첫 제주를 그렇게 일로 다 허비하고 왔지만 후회는 없던 첫 경험이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휴식이나 여행을 위해 온 것이냐 묻고 싶으실 겁니다. 목정원 작가의 책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속 문장 하나를 인용해 말하면, ‘현재적 휘말림’을 벗어나기 위해 찾았습니다. 휴식이나 여행과 달리 그건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루면 충분했고, 현재를 벗어나 가장 멀리 떠날 수 있는 곳은 당시 제게 있어 제주가 유일했기에 찾았던 겁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곳이 있죠. 현재를 벗어나 잠시 몸을 맡기는 장소 혹은 현재를 잊게 하는 사람, 현재를 잊게 하는 수단. 크게 세 가지가 있고, 그 아래 개인의 답들을 집어넣으면 수를 세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집니다. “현재를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가 이렇게 많구나”싶죠. 하지만 공통점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고 그 수가 얼마가 되었든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라는 겁니다. 익숙한 것에 마음을 두는 성정은 개인이 아닌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본능이기에. 그런 의미에서 제가 제주를 찾은 건 모순적으로 보입니다. 기껏해야 한 번 찾은 게 다고, 그마저도 일 때문에 왔다가 급히 떠났는데 도피처로 제주를 선택하다니.


제가 제주를 찾은 건 정확히는 세 가지 중 ‘사람’에 해당되며, 그건 역시 당신입니다. 당신이 거기 있기에 제주를 찾은 겁니다. 떠날 수 있는 만큼 멀리 떠나고 싶었고, 동시에 현재와 가장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자리에서 당신을 조용히 바라보다 오고 싶었습니다. 그게 제주에 있는 당신. 전국에서 모여든 바람에 흔들리는 ‘귤’이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현재를 잊게 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의 존재를 정의하는 존재. 인간을 통해 자신을 연명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를 대신해 나의 느슨한 생의 끈을 강하게 움켜쥐고 이어가 주는 존재. 당신을 보면 우주를 보는 듯 경이롭다가도 때론 나보다 한참 작은 생인 것 같아 하찮아 보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닮은 부분이죠. 광활한 우주의 변방에 자리한 먼지만 한 행성 지구에 사는 인간의 입장에서 우주는, 형용할 수 없이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입니다. 아니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그 ‘무엇’입니다. 어떤 천문학자의 말마따나 우주 앞에 선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가 돼요. 그리고 당신은 인간을 보며 우주에 비유하겠죠. 인간인 나는 당신에게 있어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큰 그 ‘무엇’이 될 겁니다.


당신을 보며 생을 되짚다가 우주를 상상하고, 그곳 어딘가에 표류된 인간임을 자각하면 이내 고독해집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생이라는 사실에 다시 우주를 잊고, 생을 되짚다가 당신을 봅니다. 당신 앞에서 이런 우주만 한 상상을 하는 게 현재적 휘말림을 벗어나는 저만의 방법이었던 겁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당신과 관련된 모든 걸 주제로 글을 쓸 겁니다. 그러다가 또 현재를 벗어나고 싶을 땐 당신을 찾아갈 겁니다. 당신을 보며 또 우주만 한 상상을 할 거고, 그럼에도 계속되는 생이라는 걸 깨닫고 현재로 돌아올 겁니다. 그땐 또 어떤 당신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되도록 자주 현재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참 많습니다. 지금은 ‘참외’라 불리는 당신이 열리고 있습니다.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