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를 간다. 정육 코너를 훑으며 오늘 먹을 고기를 고민한다. 닭, 오리, 소, 돼지. 요즘에는 닭이라고 해서 무작정 싸지도, 소라고 해서 무작정 비싸지도 않다. 국내산뿐만 아니라 수입산도 다양한 종류와 가격대로 함께 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위에 따라선 이 모든 종류의 고깃값이 거기서 거기일 때도 있다. 어디까지나 한우를 제외한 이야기다. 소의 영역에서는 육우나 한우가 수입산을 이긴다는 건 꿈같은 일이다. 같은 부위를 사면 미국산과 호주산이 훨씬 더 저렴하다. 수입 소고기의 산지는 호주산과 미국산이 주를 이룬다. 가뜩이나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에서 대량으로 길러져 저렴한데, FTA 협정 아래 자유롭게 국내에 들어오기까지 하니 한우가 가격으로는 비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결국 미국산 소 부챗살을 고른다. 1kg 정도 되는 고기의 값은 높은 등급의 한우와 비교해 절반 넘게 저렴했다. 싸도 너무 싼 가격. 이건 어쩌면 거대한 땅에서 태어났지만 아주 좁은 공간에서 먹고 자란 소였기 때문에 가능한 가격일지도 몰랐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길러지는 가축들은 대부분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진다. 공장식 축산은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정된 공간에 가축들을 최대한 밀어 넣어 사육하는 방식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사육하게 되면 비교적 적은 면적에서 적은 인력으로 많은 가축을 관리할 수 있어, 효율성과 수익성 모두를 잡을 수 있다. 공장식 축산이 우리나라에서 본격화된 건 1990년 무렵이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을 앞두고 우리나라 농림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는 국내 축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축산 농장의 대형화를 장려했는데, 그때 공장식 축산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덕분에 이때부터 우유, 달걀, 고기 등 모든 축산물의 생산량과 소비량이 크게 늘기 시작했다. 가용 면적이 한정적인 우리나라에서 공장식 축산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아니 가용 면적이 많든 적든 공장식 축산은 그야말로 축산에 꽃일지도 모른다. 땅이 좁으면 좁은 대로, 넓으면 넓은 대로 공장식 축산을 하면 어찌 됐든 방목해 기르는 것보다는 더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다. 넓은 땅에서 공장식 축산을 하면 고기는 더욱더 저렴해진다.
내가 사랑하는 농부 중 한 명인 손영수 씨에게 이 얘기를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몰라도 근심이 섞여 있을 건 분명하다. 그는 방목 생태 축산으로 소를 기른다. 소를 죽여 먹고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적어도 소가 살아생전에는 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그의 목표다. 타인의 명줄을 쥔 자의 위선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거기서 소를 향한 생명의 존중도 동시에 본다. 그런 존중 없이 그저 죽이는 데에만 혈안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가 소에게 하는 일은 어찌 보면 그리 대단치 않다. 소가 마음껏 움직일 수 있게끔 해 주는 것을 기본으로, 충분한 목초와 궂은 날씨에는 소들이 피신해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뿐이다. 우리나라 한우 산업의 구조를 생각하면 비효율적인 사육 방식이다. 더 많은 땅을 필요로 하니 비용은 그만큼 더 들고, 마음껏 뛰노는데다 먹이까지 목초인 소가 살이 찌기란 쉽지 않으므로 수익성은 크게 떨어진다. 한우의 값은 마블링의 분포 정도와 체중을 중점으로 결정된다. 근육에 기름이 많이 끼고 체중이 많이 나가야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는 것. 밀집된 공간에서 움직임을 최소로 하고, 곡물 사료만 끊임없이 먹어야 충족할 수 있는 조건이다. 소가 소답게 살면 요행에 맡겨야 겨우 충족할 수 있다. 그마저도 높은 등급을 받을 수는 없겠지만. 반면에 공장식 축산은 능히 시스템적으로 부합할 수 있다. 현행 제도는 공장식 축산에 초점을 뒀다고 생각될 정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공장식 축산과 동물복지 축산의 딜레마다. 사람을 생각하면 공장식 축산만큼 좋은 게 없다. 농가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생산량과 수입은 물론이고, 가축을 기를 때 수반되는 분뇨, 악취 등 여러 요소의 관리가 용이해 이웃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소비자의 경우 과거에는 꿈도 꿀 수 없던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육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축들을 생각하면, 이내 우리와 같은 또 하나의 생명이라 생각하면 이만큼 잔인한 게 없다. 한마디로 잔인무도한 현실판 슬래셔 무비다.
생명을 일평생 좁은 공간에 가두어 몸에 맞지 않는 먹이를 괴로워 죽고 싶을 만큼 먹이고, 부모와 삶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그저 어느 날 갑자기 인사도 없이 죽인다. 뜨거운 물과 불에 털을 태우고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내고 부위별로 토막 낸다. 그들에게 무덤은 어느 인간의 배에 있다. 잔인함은 또 있다. 바로 전염병이다. 병이란 건 언제 어디서 발생될지 모르니 방목 생태 축산을 한다고 병에 안 걸리고, 공장식 축산을 한다고 병에 걸리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적어도 자유롭게 살면 덜 죽고 덜 아플 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 자주 발생하는 가축 전염병으로는 럼피스킨(LSD), 구제역(FMD),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조류인플루엔자(AI) 등이 있다. 순서대로 소, 돼지, 닭과 오리 등에 발생되며, 치사율이 낮은 LSD든 비교적 치사율이 높은 MFD, AI든 농가에서 발생되는 즉시 살처분 대상이 된다. 치사율이 낮아도 살처분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염병에 걸린 가축은 상품성을 잃기 때문에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고 여겨져서다. 격리하고 치료하는 등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보다 죽이고 새로 가축을 들이는 게 손실을 덜 본다는 계산이다. 이들을 죽이는 방법도 간단하기 그지없다. 병에 걸린 가축과 같은 공간에 있던 가축 모두를 한번에 땅에 묻으면 끝. 같이 있기는 했지만 병에 걸리지 않은 생명도, 걸리기는 했지만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생명도 이미 병에 걸리거나 죽은 생명들과 함께 묻는다. 엄청난 비명들을 무시하며.
공장식 축산의 효율성이 하다 하다 죽이기 좋은 빌미까지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를 거친 우리는 병의 발생은 예상할 수 없으나 밀집된 공간에 모여 사는 동물들 사이에 병이 발생하는 순간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손쓸 새도 없이 병이 퍼져 농가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그 피해는 똑같이 공장식 축산을 하는 다른 농가로 퍼져 같은 피해를 양산할 테고. 그렇기에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농가와 정부는 살처분도 마다하지 않는다. 조속히 죽여 더 큰 피해를 막고, 농가에게는 새로운 가축을 들일 수 있도록 ‘위로금’ ‘보조금’ 같은 보기 좋은 이름을 붙인 돈을 지급한다.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살육과 자위의 현장이다.
나는 지금 타자를 죽여 얻은 살과 돈으로 먹고사는 것을 틀렸다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모습을 비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타자를 죽여 연명하는 건 인간뿐만이 아니니까. 먹이 사슬에 묶인 모든 존재가 그렇게 살고 있다. 사자는 물소의 목을 뜯고, 매는 들쥐를 할퀴고, 뱀은 개구리를 삼키며 연명한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 자기보다 작은 곤충을 잡아먹는다. 내가 살기 위해 죽이는 행위를 탈취의 영역으로도 확장하면 식물이라고 다를 건 없다. 땅에 빌붙어 양분을 얻는다. 벌꿀에게 빌붙어서는 다른 곳으로 생을 확장하고, 그때도 땅의 양분을 동력으로 삼는다. 그렇게 자란 풀과 열매는 어느 초식 동물과 인간의 먹거리가 된다. 이게 바로 자연의 순리다. 슬퍼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가축을 죽이는 방법만큼은 순리를 벗어났다. 잔인하다. 어떤 동물도 자신이 잡아먹을 동물을 가두어 살찌워 팔거나 먹지 않는다. 병에 걸렸다고 수천수만의 동물을 땅에 묻지도 않는다. 그것도 산 채로. 지고의 존재라 자칭하는 인간이 동물보다 못한 짓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살육의 현장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란다.
누군가는 동물 인권에 환멸감을 느낀다. 일부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들의 육식 경멸과 동물 인권 보호를 호소하는 목소리에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동물 인권이 물론 중요하나 제 눈에 귀엽고 가여운 일부 동물에만 국한해 보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상종하기 싫다. 생명을 죽이는 게 싫어 육식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식물을 먹는 걸 보면 위선적이기 짝이 없다. 생명의 크고 작음이 있음을 제 입으로 인정하는 꼴이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한답시고 소리 높여 외치는 동안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족속들은 또 어떠한가. 동물 복지를 외치면서도 비싼 고깃값에 욕을 하며 싼 고기를 찾는 이는? 자신이 외치던 동물 인권을 자신이 반박하는 꼴이다. 우리는 결국 다른 생을 죽여 살 수밖에 없는 자기모순적인 존재다. 그래서 강요하지도, 피해를 주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인간이 나는 가장 존경스럽다. 그게 나에게는 가축이 사는 동안 그답게 살 수 있게 해 주는 몇몇 농부들이다.
손영수 농부만 해도 어떠한가. 그는 자신의 재산과 현재와 미래를 걸고, 더 많은 돈이 들지만 돈이 더 안 되는 동물 복지에 힘쓴다. 이렇게 기르면 현행 등급 제도에 맞출 수 없기에 판로 걱정을 다른 한우 농가보다 몇 배는 더 해야 함에도. 보편적인 한우와 달리 마블링의 맛이 다소 떨어지는 데 반해 생산비는 더 많이 들어갔으니 가격 책정이 쉽지 않음에도. 이 외에도 수많은 어려움이 산재해 있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해 나가는 게 바로 손영수 농부다.
그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더 많은 동물이 사는 동안 덜 고통스러울 수 있다. 어쩌면 한때 행복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게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시대 변화에 맞춰 동물 복지에 힘쓰는 농가를 대상으로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고, 소비자는 동물 복지 상품의 가격을 합리적으로 보아야 한다. 조금 더 욕심을 내면, 동물 복지로 상품을 생산하는 업체와 농가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행보를 꾸준히 지켜보는 것도 좋겠다. 수익이 받쳐 주고 소비자도 지지하면, 선두에서 타자를 죽이는 이들이 그저 죽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물의 생을 가늠하게 될 것이다.
그 미래를 상상해 본다. 공장식 축산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악습으로 전락해 있고, 모든 동물이 사는 동안 그들답게 살다가 죽어서는 다른 생으로 치환된다. 그들의 무덤은 여전히 어느 인간의 배에 있지만, 그들의 이름이 남았다. 세상 어딘가에 그들이 뛰놀던 땅이 있다.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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