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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Nov 12. 2023

사랑을 말하는 수박

“수박 한 통도 배달됩니다.”


여름이면 손님을 향해 말하던 우리 과일 가게만의 메리트. 얼마 이상 혹은 수박과 함께 다른 과일도 사야 배달을 해 주던 경쟁 가게와 달리 우리는 수박 한 통만 사도 배달을 해 주었다. 별도로 배달하는 사람을 두면서까지. 가장 작은 5kg짜리 수박도 예외는 없었다. 주문 방법은 간단하다. 가게를 찾은 고객은 먼저 쌓여 있는 수박을 구경하며 이따금씩 손으로 노크를 하듯 두드려 본다. 소리가 좋은 걸 찾는 것이다. 맑으면서도 통통 튀는. 그런 수박이 잘 익고 껍질도 얇은 수박이라고 알려져 있어서다. 여러 개를 두드려 가며 최종적으로 마음에 드는 수박을 고르면, 옆에 서 있던 나는 고객이 불러 주는 집 주소를 매직으로 수박 껍질에 적는다. 그 수박은 수 시간 정도 있다가 고객의 집으로 배달된다. 본인이 직접 고르기가 어렵거나 수차례 우리 가게에서 수박을 사 먹었던 고객은 더 심플하다. 단골 고객은 주소를 말할 것도 없이 얼마짜리 수박을 가져다 달라고 하기만 하면 된다. 단골의 집 주소는 싫어도 외워지기 마련이다. 한편 자신보다는 장사꾼이 고르는 게 더 확실할 거라고 보는 고객은 가격대와 집 주소 두 가지만 알려 주면 된다.


수박 한 통 배달 전략은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좋았다. 당시 내가 일하던 전통 시장은 주차장이 협소해 도보로 장을 보러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야말로 동네 장사였고, 고객들 대부분 튼튼한 장바구니를 필수다시피 가지고 다녔다. 종류는 손으로 들고 다니는 쇼핑백 형태 아니면 캐리어처럼 끌고 다니는 형태. 그리고 시장에 나올 때 장바구니를 챙길 정도의 고객은 과일만 사지 않는다. 고기, 생선, 야채, 건어물, 반찬, 간식거리, 생활용품 등등 다양한 걸 한번에 사서 가져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수박은 쉽지 않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장을 보러 오지만, 수박은 다른 물건과 함께 가지고 다니기에는 무게도 많이 나가고 부피도 크다. 수박 한 통 배달은 이 고민을 순식간에 해결하는 탁월한 서비스였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수박을 사려면 어찌 됐든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거나 본인이 가져가야 하거나 가족, 친구, 지인의 힘을 빌려야 했는데, 우리 가게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수박 한 통 배달은 과일 가게의 기본이 된 것처럼 보인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수박 한 통쯤이야 인터넷에서도 주문할 수 있으니, 수박을 먹기 위해 애써 힘을 들이거나 불필요한 소비를 할 필요는 없어졌다. 나의 여자친구는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다.


여자친구의 동네에는 그녀를 포함해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과일 가게가 하나 있다. 근처 전통 시장에 있는 가게로, 내 기억이 맞는다면 업력이 5년 정도 된 가게일 것이다. 잠깐 다른 이야기인데, 사실 나는 그 가게를 싫어했다. 과일뿐만 아니라 온갖 야채와 공산품까지 파는 작은 마트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마트라 이름 지어 불렀다면 모를까 상호에는 버젓이 과일 가게라고 써 붙이고 있으니, 나는 그게 싫었다. 기만하는 것 같았고 전문성은 없어 보였다. 내가 과일 일을 배운 곳은 그야말로 과일 가게였다. 오로지 과일만을 다루며 과일 하나로 월 1억에 가까운 매출을 찍는. 내가 처음 과일 가게에서 일할 당시는 한창 저런 가게들이 역전을 중심으로 우후죽순 생겨나는 시기였다. 야채, 공산품, 과일 정도면 양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가게들은 생선, 축산물까지 가리지 않고 팔았다. 품질은 누가 봐도 낮았다. 농산물 경매 참여자들의 눈에는 결코 찰 수 없는 하품의 상품들이 그곳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덕분에 상상할 수도 없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가 되긴 했다. 그것이 잡화상이나 다름없는 가게의 경쟁력이었고, 실제로 먹혀들었다. 손님 스스로도 품질을 논하기에는 너무나 저렴하니, 나이대가 있으신 분들부터 젊은이들까지 역전 잡화 과일 가게로 모여들었다. 물론 그런 가게들 중에서도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취급하는 가게가 있기는 했지만, 다수의 가게가 새겨 놓은 이미지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과일만을 전문으로 팔던 내 입장에서는 그렇기에 좋게 볼 수 없던 것이다. 과일 가게에서 일할 당시 그런 가게와 경쟁할 일이 없었는데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이 마음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좋아한 그 가게는 달랐다. 이런 가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비싼 가격대의 과일이 널려 있었고, 보기에도 좋던 그 과일들은 실제로 맛까지 좋았다. 비싼 게 다 맛있는 건 아니지만, 보기 좋고 맛도 좋은 과일이 결코 싼 경우는 없다. 그곳이 딱 그랬다. 과일만 팔던 시대가 생존을 위해 변한 걸까. 잡화상 같던 역전 과일 가게가 이미지 쇄신을 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 가게는 잡화상 같던 과일 가게들 중에 꾸준히 좋은 품질을 고수한 사람들 중 한 명의 가게인 걸까. 뭔지 몰라도 그 가게는 달랐다. 아쉬운 점이라면 수박 한 통 배달이 안 된다는 것. 그 가게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수박을 가장 좋아하는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안타까울 정도의 단점이었다.


여자친구는 여름이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수박을 살 정도로 수박을 열렬히 좋아한다. 당연히 수박도 그 과일 가게에서만 사는 편이었고, 살 때마다 차를 끌고 가거나 캐리어식으로 된 장바구니를 끌고 가 힘겹게 사 오곤 했다. 여러 과일과 함께 주문해 배달받으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애초에 배달을 하지 않는 가게라 그것도 어려웠다. 어머니와 여동생, 여자친구 이렇게 여자 셋만 사는 집이라 특히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몇 차례 다른 과일 가게에서 사거나 인터넷에서 구매하길 권해 보기도 했다. 여자친구는 다른 과일 가게에서도 몇 번 사 먹어 봤지만 그 과일 가게만큼은 아니었다고, 거의 맹신했다. 고집스러워 보일 수도 있으나 과일을 팔았던 내 입장에서는 그건 또 그거대로 든든했다. 그녀 같은 사람들 덕분에 내가 과일을 팔며 먹고살 수 있었으니까. 인터넷 구매의 경우도 같은 이유로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더불어 농산물만큼은 어딜 가든 쉽게 구매할 수 있을뿐더러 배송 과정 중 신선도 문제와 오버 용량, 맛 등등 변수가 너무 많아 더욱더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수박을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내가 직접 사다 주는 것. 몇 키로짜리든 여자친구의 집에 수박이 떨어졌을 때쯤 산책하는 길에 수박을 한 통 사, 가게에서 집까지 2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 여자친구에게 전해주었다. 몇 년을 만나는 동안 계속 해 오고 있는 일이다. 잠깐이면 모를까 그 정도의 거리를 수박을 들고 걷는다는 건 남자인 나도 힘든 일이다. 게다가 계절은 여름. 금세 땀이 나고, 무엇보다 보통은 수 키로를 조깅하고 난 뒤에 수박을 사러 갔기에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그랬다. 당장 지난 주에도 그녀에게 수박을 사다 주었다. 힘은 들어도 사다 줄 때마다 한결같이 고맙다며 사랑한다 해주는 여자친구가 좋아 계속하는 중이다. 내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 사랑해. 그래서 여자친구는 자주 서운해하지만 그럼에도 괜찮다고도 말한다. 내 행동에서 그것이 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부터였다. 수박이 먹고 싶은 사람에게 수박을 가져다주는 일은, 당신을 대단히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표현 중 하나라고. 무거운 수박을 오직 당신을 위해 가져가는 일은 내게 있어 당신의 고생을 내가 대신하겠다는 의미다. 그 고생을 계속하는 이유는, 그렇게 나만의 고생으로 두면 당신이 어느 한순간은 태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매 순간 고단하기에. 그 작은 순간만이라도, 설령 그 순간이 사사롭고 하찮은 순간일지라도 그때만큼은 나로 인해 당신이 편했으면 좋겠다. 내게는 사랑이 그렇다. 고생을 대신하길 주저하지 않는 마음. 상대가 좋아하는 걸 건네는 마음.


우리에게 수박은 사랑으로 발음되기도 한다.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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