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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Dec 25. 2023

옷과 직업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았다. 한 번 마음에 들면 그게 낡을 때까지 입는 나의 성정상, 이 옷도 아마 때마다 나에게 입혀질 것이다. 옷을 살 때면 꼭 기존에 갖고 있던 옷들과의 조화를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이 옷은 내게 더욱 특별하다. 아예 새로운 부류의 옷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좀처럼 잘 일어나지 않는 일. 한 번 마음에 드는 건 너무 마음에 드는 나머지 똑같은 걸 몇 개씩 사서 쟁여 놓다 보니, 내 옷장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 한 번 마음에 들면 낡을 때까지 입는다고 했지만, 실은 언제나 낡은 옷의 의지를 이어받을 똑같은 옷이 준비되어 있다. 혹 단종이 되거나 팔던 곳을 잊어버린다 해도 최소한 비슷한 디자인의 옷이라도 준비되어 있다.


그렇기에 적어도 내 옷장에서만큼은 세월을 가늠할 수 없다. 과거의 내가 찾아 걸어 두었던 것들을 현재의 내가 그대로 물려받아 입고 있으니까. 추워지면 꺼내 입는 종아리의 반을 가리는 기장의 검은색 코트는 어느덧 나와 일곱 번의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있다. 가을에는 단신으로, 겨울에는 그 안에 여러 옷을 겹겹이 두어 나를 보호해 준다. 이제는 처음 그때처럼 쨍하게 발하던 검은색도 많이 약해지고, 매끄럽던 표면도 보풀이 울긋불긋 올라왔지만, 아마 몇 번의 계절을 더 나와 함께할 것이다. 코트에 비하면 나와 함께한 시간이 짧은 여자 친구는 이제 그만 버리라고, 다른 코트도 좀 입으라고 해서 새 코트를 몇 번 산 적도 있다. 선물도 받았었다. 그러나 이 코트보다 나은 건 없었다. 특유의 두툼한 원단 덕분에 보온성도 좋고, 몸에 걸치면 힘 있게 모양을 갖추는 그 느낌을 다른 코트에서는 찾기 어렵다. 사실상 어쩔 수 없이 이 코트를 입는 것이나 다름없다. 비슷한 느낌을 찾지 않는 이상, 이 옷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몇 년이 아니고 되는 데까지 나는 이 옷을 입을 것이다.


다른 옷들과 신발도 모두 이런 합리화 속에서 계속해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내가 내게 물려주고, 물려받고 있다.


신발은 옷만큼이나 오래가는 물건이 아닌지라 하나를 오래 신기는 어렵다. 뭐 누구는 몇 년씩도 신는다는데, 조깅을 하면 6~10km를 뛰고, 산책을 하면 2~3시간씩 걷는 나는 몇 달이면 신발 밑창이 다 달아 버려서 자주 신발을 사야 한다. 그럼, 그때마다 똑같은 신발을 심지어 색깔도 똑같은 걸로 산다. 최근 3년 동안은 디스커버리의 ‘브릭’이라는 이름의 화이트 색상 신발을 주로 신었다. 벌써 여섯 켤레째 사서 신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운동할 때와 일상복에는 이 신발을 신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스타일을 방황하다 끝내 가닥을 잡은 나만의 스타일.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고집하면서 조금씩, 그러면서도 결은 벗어나지 않도록 발전시킨 끝에 지금의 옷들이 내게 남았으니, 옷들에게 말하고 싶다.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고. 이만하면 이제 내가 입는 옷들은 타인에게 말없이 드러낼 수 있는 나의 본모습이다. 오버핏과 무채색, 포멀함을 적당히 버무려 입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튀지 않으면서도 깔끔한 스타일을 좋아하고, 바지는 그대로 둔 채 매일 상의만 바꿔 입는 것으로 늘 새로운 옷인 것 같은 느낌을 의도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의 비용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람. 즉 '나'라는 사람은 복잡한 것보다는 실용적인 것을 선호한다는 걸 옷 하나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옷이라는 주어를 ‘직업’으로 바꿔도 문장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십여 년을 유치원 선생님으로 사는 나의 연인을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마다 꼭 듣는 말이 있다. 수많은 말 중 틀린 말을 제외하고 맞는 말만 말하면 “아이를 좋아할 것이다.” “인내심이 강할 것이다.” “생활력이 좋을 것이다.” 등이다. 한 유치원에서 십여 년을 선생님으로 근무하니 그녀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타인은 직업을 통해 그녀의 본모습을 알아챈다. 그녀는 이렇게 오래 입은 직업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입을 것이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옷이고, 마침 또 탁월하게 잘 어울리는 직업이기에.


나는 그녀와 다르게 최근 옷을 새로 샀다. 전에 입은 적 없던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옷은 아니다. 글을 쓰고, 넥서스 출판사를 통해 첫 책을 내고, 책폴을 통해 두 번째 책을 내고, 독립출판도 해 보았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옷은 아니다. 조금이지만, 원래 있던 옷 스타일이 새로운 옷에도 얼핏 보인다. 그래서 마냥 어색하지 않다. 짐작컨대 시간이 지나 이 옷도 내게 잘 맞을 때가 오면 기존에 입던 옷들과 매치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로 듣고 손으로 적어 종이에 담는 일. 세상이 변하고 종이라는 물성은 가면 갈수록 더 자주 실효성을 증명해야겠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기에 나는 이 옷을 입어보기로 한다. 이 직업이 또 하나의 나의 본모습이 되길 바라며.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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