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성대가 길었어, 가끔은 평화 없는 삶도 필요해.
입 한 번 열지 않고 보내는 날이 종종 있다. 진짜 입을 말하는 걸 수도 있고, 입을 대신해 말하는 손가락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날은 입도 손가락도 쓰지 않는,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는 날이다. 휴대폰과 컴퓨터 같은 온갖 소통 도구를 가지고도 나는 능히 그 일을 해낸다. 누구를 잘 곁에 두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의식적으로 한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경지. 친구라고 부를 법한 이들이 있으면서도 나는 가능한 한 혼자 있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혼자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온전한 평화를 느끼고, 그 평화를 사랑한다. 혼자 가는 카페, 혼자 걷는 거리, 혼자 먹는 밥, 혼자 보는 책과 영상, 혼자 잠드는 밤 등등 내가 사랑하는 평화는 혼자일 때 발현된다.
이런 내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고, 동시에 모순적인 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호의로 나는 기꺼이 자기모순적인 일을 기적이라 포장하며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걸 것이다. 그녀를 만나면서도 나는 여전히 나의 평화를 지키고 있으므로.
그녀가 계속 오냐오냐하니 나는 더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그녀와 술 한잔을 하던 날이었다. 같이 술잔을 부딪히지만 진짜 술은 내 술잔에만 있던 날, 소주 한 병을 거의 비워갈 때쯤 나는 말했다. “나는 너를 만나면서도 외롭다. 네가 나를 진짜 외롭게 해서가 아니라 너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없어 외롭다.” 그 말을 나의 평화를 지켜주는 이에게 속도 없이 했다. 호의를 권리로 알았나 보다.
어떤 잘못은 기꺼이 용납받았을 때 깨닫게 된다. 그녀는 나의 뻔뻔함을 용인하고 공감해 주었다.
“참 묘해. 사랑하면 볼꼴 못 볼꼴 다 보게 되잖아. 어떤 사랑은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 보일 정도로 적나라하고, 어떤 사랑은 한없이 희생적이기도 하면서, 사랑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여하튼 서로의 거의 모든 걸 보여 주게 만들어.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반드시 하지 못할 말이 생긴다는 게 묘해. 뭐가 어떻든 절대 밑천을 다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의미잖아. 그게 말이든 행동이든. 네가 외로운 건 아마도 꾸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겠지?
사랑하면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안심시켜 주려고 한다는 걸 널 보며 깨달아. 넌 행동에서부터 그게 보여. 겨울에 손을 잡을 땐 꼭 내 손을 잡아서는 너의 주머니에 넣고, 내 손가락이 차가우면 내 손을 주먹 쥐게 만들고는 네 손으로 그 주먹을 감싸. 손가락마저 따듯해지라고. 2년 전이었나? 강릉으로 여행 갔을 때 기억해? 낮 동안 아주 잘 놀다가 밤이 되었을 때, 내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잖아. 또 신장 쪽에 문제가 생겨서. 그땐 내 통증이 그건 줄 모르고, 그저 허리 쪽이 아프다며 밤새 신음했어.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잠들 수는 없었지. 그때 네가 뭘 했는지 알아? 혹시나 잠이 들까 봐 아예 일어나 앉아서는 내 허리를 계속 만져 줬어. 그리고는 아침이 되자마자 혼자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갔지. 약국을 찾겠다고 구석구석 뒤지러. 일요일이라 병원도 약국도 연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기어이 찾아서는 약을 사와 나한테 먹여 줬지.
행동이 그런데 말은 말해 뭐 해. 매번 산책길이면 나한테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보고, 나 걱정하지 말라고 아파도 안 아픈 척, 심란해도 안 심란한 척, 그저 무상하게 살아가는 척해. 집안일, 글 청탁, 회사 일로 분명 너도 힘들 텐데, 넌 자기에 대해선 우스꽝스러운 말만 하면서 나의 하루를 묻기만 해. “오늘은 유치원에서 어땠어?” “스님이 공중부양을 하면? 어중이떠중이”라는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이상한 개그를 남발하는 식으로.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느 날 불현듯 깨닫게 되더라. 난 너를 만나면서도 친구를 만나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넌 아니라는걸. 나 말고 이야기할 곳이 없는 넌 그마저도 내 안부가 먼저였으니, 외로웠을 거야. 네 덕에 나는 그 외로움을 모르는데. 이제라도 네가 나처럼 이런저런 말을 했으면 좋겠어.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친구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 잘 안되더라도 노력했으면 좋겠어. 겁먹지 말고. 사랑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잖아, 기대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잖아.
나도 널 지킬 수 있어. 네가 나를 아무리 실망시킨다 해도 그게 우리 사랑에 영향을 줄 정도는 못 돼. 나도 널 지키고 싶어. 그러니까 너무 혼자가 되지 마. 많이는 아니더라도 종종 친구도 만나 봐. 태평성대가 길었어. 가끔은 평화 없는 삶도 필요해.”
나의 경솔함을 도리어 용인해 주는 그녀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더 자기모순적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를 부정해서 이런 여자를 만날 수 있던 것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이 여자의 주먹을 더 많이 감싸 쥐고 싶어졌다. 더 맛있는 걸 먹이고, 아프지는 않나 더 많이 들여다보고, 더 많이 안부를 묻고, 더 많이 웃겨 주고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 내가 외로운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졌다.
그리하여 지금은 이렇게 현수와 중연이를 만나고 있다. 모두 그녀 덕분이지만 숨은 공로자도 있다. 못난 나를 끝까지 끊어 내지 않은 현수와 중연이다. 이런저런 핑계로 만남을 피하고 연락을 피하던 나에게 꿋꿋이 안부를 물어봐 주던 두 사람이 있어, 나는 친구에게 돌아갈 길을 내내 잃지 않고 평화는 평화대로 누릴 수 있었다. 아주 욕심 많은 삶이었다. 그 욕심이 여전히 끝나지 않고 새로운 욕구를 낳더니 그것마저도 충족하기에 이른 걸 보면 여전히 욕심 많은 삶이라 말하는 게 맞겠다. 나는 여전히 언제든 혼자가 될 수 있고, 혼자만의 평화를 느낄 수 있다. 이 여자를 사랑하면서, 친구들에게는 허심탄회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혼자라는 평화와 함께라는 평화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염치가 없어서, 요즘은 친구들의 말에도 자주 귀 기울인다. 언제까지고 두 평화를 계속해서 오가고 싶다.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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