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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선택

제발 골라줘

by 윤슬

나는 엄마와 사이가 좋은 딸 중의 하나이다. 물론 싸우기도 많이 싸운다. 아무튼 최근에 엄마와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닌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기 때문에 공연장 근처에서 만나서 밥을 먹고 공연을 보거나, 공연을 본 후 밥을 먹기도 한다. 이 밥 메뉴를 정하는 것이 우리 사이에서는 싸움으로 번지기 쉽다. 밖에서 엄마는 내가 1부터 10까지 정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다 먹은 후에 '여기 이런 것도 있던데? 아니 그냥 그렇다고~' 혹은 '찾아보니깐 이런 집도 있더라' 등의 말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정말 기분이 좋게도 엄마가 먹고 싶은 음식의 종류를 말했다.


- 저거 먹어 봤어? 어떤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맛있어 보이더라.


멕시코 음식점이었다. 나도 메뉴에 대해 잘 알지는 못 하지만, 먹어본 적이 있었고 맛있었다.


- 저 집은 아닌데 먹어 봤어. 그럼 저거 먹을까?

- 맛있으려나? 일단 생각해두고 이따가 공연 끝나고 다시 보자.


공연이 끝나고 엄마는 멕시코 음식은 까맣게 잊은 듯했다. 먹고 싶은걸 물어도 본인은 먹고 싶은 게 없다며, 결국은 집에 가서 먹자는 얘기가 나왔다.


- 아니 아까 전에 멕시코 음식 먹자며?

- 아 맞다. 그럼 그거 먹을까?

- 먹으러 가.


먹고 싶은걸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지, 99%가 정해졌는데도 물어본다. 하지만 본격적인 건 그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이다.


- 메뉴가 뭐가 많네. 먹어 봤다며 뭐가 맛있어?

- 나도 많이 안 먹어 봐서 몰라. 뭐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 엄마가 맛있어 보이는 걸로 말해봐.

- 아이, 난 모르겠어. 저건 뭐야? 저것도 맛있어 보이네.

- 그럼 저거 먹어. 양이 적어서 다른 것도 더 시켜야 해.

- 모르겠어. 세트는 뭐야?

- 세트에는 저게 없어. 그냥 단품 몇 개랑 음료수를 따로 시키면 똑같지 뭐.

- 아유 복잡해. 그냥 세트 시켜.

- 아니, 저게 먹고 싶다며? 뭐가 복잡해. 그냥 그림을 보고 맛있어 보이는 걸 말해봐. 그럼 내가 시킬게. 어차피 세트를 시켜도 그 안에서 맛을 골라야 해.

- 아냐 그냥 네가 알아서 시켜. 세트 하던가.

- 자꾸 무슨 소리야. 먹고 싶다고 한 건 세트에 없고, 세트 안에서도 골라야 한다고.

- 네가 잘 알지, 난 모르겠어, 맘대로 해.


정말 엄마는 내 인내심을 매번 시험한다. 나는 엄마가 먹고 싶은 걸 사주려는 건데, 엄마는 집에서 얘기를 할 때면 본인이 똑 부러지게 메뉴를 고를 것처럼 해놓고 밖에 나와서는 잘 아는 네가 맘대로 하라고 한다. 나도 엄마와 처음 가는 곳이지만 엄마에게 나는 그 음식점 전문가이다.


어떤 영국 드라마에 이런 장면이 본 적이 있다. 사춘기 자녀를 둔 두 엄마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친구가 되었다. 한 명은 가부장적인 남편을 두고, 평생 본인의 내면을 억누르고 살아온 전업 주부였고, 다른 한 명은 본인의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둘은 어느 바에 갔는데, 각자 술을 시키는 장면에서 전업주부인 여자는 뭘 골라야 좋을지 몰라했다. 그날 가족들의 밥 메뉴를 고르는 것 말고, 본인이 먹고 싶은 것을 골라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다른 사람이 말한다. 처음에 고르기 어려우면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찍어 보라고. 난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평생 본인이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은 후순위로 두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 쉬운 메뉴 선택이 그녀에게는 낯선 일인 것이다.

엄마가 메뉴를 못 고를 때 화가 나는 이유는 엄마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나라고 생각하는 죄책감 때문일까?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터질 것 같더라도 엄마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음식이 많았으면 좋겠다.

다음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서 엄마가 메뉴를 못 고른다면, 나도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 엄마, 그럼 눈을 감고 찍어봐. 우리 그거 먹자. 맛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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