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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차례상의 딸기

딸이 사온 봄딸기가 제일 맛있지요.

by 따뜻한 봄숲

베란다 가득 잔치음식


1998년 1월 26일

학교에서 돌아와 집 문을 열자마자 고소한 전 냄새가 풀풀 퍼진다. 고기, 야채, 해산물 여러 가지 재료와 부침, 튀김, 탕, 무침 등 온갖 종류가 섞이면서 더 맛있는 냄새가 난다. 꽉꽉 밥이 눌려진 도시락을 먹고 왔어도 다섯 개 정도는 그 자리에 서서 다 집어먹는다.


베란다에 나가보면 벌써 냄비뚜껑이며, 반찬뚜껑이며, 키친타월로 덮어둔 음식 담긴 채반들이 온 화단 가득이다. 굴비, 두부전, 녹두전, 산적, 갈비찜, 삼색나물


내가 새벽에 일어나 학교 갈 준비할 때부터 딱딱한 밤 겉껍질 까고 있으시더니 베란다 바닥 한켠, 깨끗한 물에 희고 노오란 밤알맹이가 넘치듯 담겨있다. 이걸 언제 다했으려나.. 그땐 그 생각을 못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는 늘 나 깨기 전부터 잠들고 나서 까지, 부엌에 있었다. 손님들 손에 전이며 나물이며, 식혜 한 통에 떡이라도 싸줄 때까지 늘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일을 만들어 다 넣어 주고 나서야 엄마는 일을 멈췄다. 풍족한 살림도 아니었는데도 늘 손님이 왔고 늘 부엌은 바빴다.


차례를 지내는 설 날이 오면 제일 쉬운 것부터 도왔다. 산자와 약과 꺼내서 쌓기. 물에 담긴 밤톨 쌓기. 과일 머리 동그랗게 잘라서 2단으로 올리기. 차례상에 올라가는 설날 차례상의 딸기는 그야말로 가장 좋은 위치에 가장 잘 보이게 이쁘게 올린다. 이 날이 아니면 딸기를 먹어 본 기억이 없다.


차례를 지내려고 상 앞에 서면 엄마는 부엌에서 조용히 상을 바라보신다. 온 나라 잔칫상 같은데도 부족한 게 있는지 자꾸 살펴보신다. 나는 아빠 뒤에 서서 끝나고 나면 제일 먼저 멀 먹을지 고민을 시작했다. 약과? 밤? 딸기지! 매번 고민을 하지만 매번 딸기다. 언니하나 나하나 동생하나 돌아가며 먹기 시작하면 금세 딸기는 없다. 엄마입에 하나 넣어 줄 생각도 못하고 말이다. 그렇게 딸기가 입 속 가득히 달았다.



방방가득 손님


손이 큰 엄마와 외동으로 외롭게 자라 사람을 좋아하는 아빠덕에 설날아침 차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침저녁으로 내내 손님들이 찾아왔다. 방마다 들어차 게임하는 사촌오빠언니들, 낮잠 자는 이모들, 고스톱 치는 아빠와 이모부들.


배부른 배 쑤욱 소화시켜 줄 시원한 식혜 20잔 찰랑이면서 배달하고 나면 부엌에서 내 엄마는 그 새 또 허리도 못 편 채 상을 차렸다. 아랫찬장 안쪽 깊숙이 넣어 둔 손님용 수저묶음도 한 통 꺼내고, 밥그릇, 국그릇도 10개씩 20개씩 수북하게 꺼냈다. 상도 4개씩 편다. 거실에서 화투 치던 이모부, 삼촌, 아빠와 어린 조카들, 이모가 먼저 자리에 앉기 시작하면 엄마는 탕국과 전을 다시 데우고 외숙모와 막내이모가 갈비찜과 잡채를 담고 갓 지은 쌀밥을 푸고 나는 쟁반에 찬을 날랐다.


엄마가 앉을 때 즈음이면 앞서 다 먹은 가족들이 먹을 과일상을 차린다. 다시 일어서서 미리 장 봐둔 과일들을 베란다에서 꺼내러 엄마는 또 부엌으로 들어간다. 따라 들어가는 이모들과 함께 떡이랑 과일을 또 한가득 내오신다.


그렇게 일 년에 몇 번씩이나 상차리던 우리 집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니가 시집가고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잔치가 사라져 갔다. 부르지 않으니 손님이 오지 않았다.



엄마의 부엌


결혼하고 나서 5년 즈음인가 지나서 엄마집 부엌 찬장을 열었다. 앞접시며 국그릇이며 30개씩 40개씩 쓰지도 않는 그릇들이 칸마다 그득하게 차 있었다. 필요 없는 부엌살림은 이제 버리라고 잔소리를 했다. 계속 못 들으신 척하길래 너무 많아서 정리하기 힘드셔서 그런가 싶어 몇 번을 더 찾아가서 부엌찬장을 텅 비어냈다.


하나씩 꺼내다 보니 큰 딸, 작은 딸, 막내아들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싸주던 도시락통들이 아직도 있었다. 매 여름마다 매실청 담아주던 빈 생수통들, 식구는 이제 엄마랑 남동생 둘뿐인데 밥공기 국공기 수십 개가 계속 따라 나왔다. 밥도 반찬도 조금씩 드시면서 매번 잡채며 갈비찜 담던 큰 잔치상 접시들 뿐이다. 하나씩 꺼내면서 딸은 조잘조잘 잔소리하는데도 옆에서 말없이 바라만 보셨다. 알면서도 못 버린 그릇들. 앞으로도 그릇들을 쓸 일 없는 걸 아신다. 큰 박스로 몇 개나 밖으로 옮기고 허리피고 있으니 나를 등 돌려세우시곤 제 집에 가라고 미셨다. 듣기 싫으셨던 거다. 정든 그릇들 다 내다 버린 정 없는 딸이 되었다.


엄마집에 갈 땐 딸기를 사간다. 엄마는 참외랑 복숭아를 제일 좋아하시는 걸 아는데 딸기를 사드리고 싶다. 괜히 미안함에 딸기라도 입에 넣어드리려고 제일 빨갛고 달아 보이는 탐스런 봄딸기를 골라 사간다. 오늘은 김치전이랑 배추전 해달라고 졸라서 엄마집에서 밥 얻어먹고 가야겠다. 다 해먹고 나면, 부엌에서 내내 그릇 가득히 허리굽혀 상차림 안 차려도 딸이 사온 봄딸기드시면서 힘듦도 서운함은 녹여주세요.



조용한 작가생활

따뜻한 봄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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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