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생각
일기장엔 날짜를 쓰지 않았다. 칸이 없었고 칸이 있었더라도 며칠만 쓰다 말았을 나였다. 하지만 날짜는 쓰지 않더라도 하루씩 일기를 쓰고 싶었다. 하루를 보낸 나의 힘든 마음들을 그렇게 풀어내다 보면 조금이라도 내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기장엔 날씨도 쓰지 않았다. 흔한 문장 속에서도 날씨나 시간과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개는 힘들다는 이야기였고 조금 예외가 있다면 사람들이 두렵다는 이야기, 그리고 가식적인 나와 그로 인해 굳혀지는 내가 아닌 모습들이 싫다는 이야기로 모두 조금씩 한 가지를 싫어하며 모인 것이 너무나 어두워 보였다. 튀어나올까 봐 두려운 진심들이 일기장을 눌러두고 있었고 때로는 진실하지 못한 모습이 나의 모습보다 나아보여서 억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때의 나의 단어들은 자주 그 상황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었다.
일기장의 글씨들이 두꺼운 표지까지 연필 자국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아픈 기억들을 꾹꾹 눌러쓰며며 나의 상황들에 쌓인 화를 뱉어내는 것 같았다. 눌려진 자국이 생긴 것은 힘이 세서가 아니었다. 빛을 내지 못하는 옅은 단어들이 그 일기장을 벗어나길 원하는 표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와 같은 한 아이만을 자유롭게 만들어줄 순 없었다. 초라했지만 그만큼 모든 단어들이 나다운 일기장이었고 그래서 전부를 보내주기로 했다. 이왕이면 힘듦을 정리하는 날도 다시 오지 않기를 바랐고 일기장을 다시 쓰는 날이 오더라도 화사한 펜으로 가끔씩 메모를 해두는 그런 일기장이 되기를 바랐다.
단어는 일기장에서 어두웠지만 다른 단어들과 붙어있느라 따뜻했고 그 단어의 몫만을 해도 되는 편리함이 있었다. 그러나 단어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일기장을 나왔다. 나는 원래 힘들 때마다 장소를 먼저 탓했었다. 이번엔 기대를 크게 가진 장소여서 마음이 약해질 때도 괜히 힘든 이유를 돌려서 말했었는데 나라는 단어가 혼자 있을 때의 가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자 미뤄왔던 실망을 한 번에 쏟아냈다. 써 내리고 싶은 행복이 없는 불안한 일기장에서 매일 미움을 표출하니 아무 곳에도 기대지 못하는 내가 미워졌다. 누군가를 향한 미움은 바로 나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내 글씨처럼 선명해서 단어만큼 짧은 문장이 되더라도 얼른 어둠 속을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마음이 여려 쓰지 못하는 단어가 결국엔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음으로만 내뱉으면 누군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기억할 수 있으니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수없이 나를 내뱉는다. 단어는 단어 곁에 있을 때 더 빛났던 것일지 하나뿐인 지금의 단어가 더 굳건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벗어난 단어 하나는 지워지지 않는다. 단어 사이의 틈이 일정하지 않으면 가장 여린 단어를 지워내고 다시 쓰곤 한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보다 선명하길 원하는 단어는 노트 속을 떠나간 후에야 흐릿해지지 않을 수 있다.
더이상은 내 것이 아닌 단어들이 새로운 자리에서도 나답길 바란다. 모두 같은 자리에서 웃고 있는 풍경은 바라고 있지 않지만 소식으로는 단어들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모든 단어는 단어로서의 몫만 다해왔었기 때문에 직접 문장이 되는 것은 버거울 것이고 해서는 안되는 도전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기꺼이 문장이 될 수 있는 존재들도 있고 문장이 되어야 하는 공감 없이 긴박한 상황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런 상황들이 모두 이해받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해라는 작은 소원 안에 가녀린 단어들이 갇히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보내는 순간들이 가치 없는 시간들로 불릴 때면 가치 있는 시간이라며 따지기보다는 더 가치 없는 시간들이 많았다는 걸 증명하려 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간이 길었고 이제야 나를 일깨워줄 의미를 찾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속도와 방향을 증명하는 것은 이해받거나 인정받기 싫은 마음이었다. 과정 없는 극복은 없다. 극복하고 싶은 마음과 극복할 방법까지 주어졌다면 극복하지 않았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건 너무나 급하다. 아직 무너진 시간에 있는 몸을 급하게 현실로 끌고 오면 마음은 나를 따라오지 못하며 멀어진다. 그래서 나를 미워하는 시간도 가지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좋은 시선으로 바라봐주기도 한다. 끝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힘든 만큼 얻게 된 것을 떠올리며 혼자 화내진 않으려 한다. 일기장에는 내가 안아주고 싶던 가녀린 문장들이 있었다. 마음이 좁아서 힘들던 좁은 장소는 벗어나고 싶은 장소가 되었고 나오고보니 숨 쉬기가 편안한 것 같다. 다친 것도 많고 줄어든 자존감도 눈에 띄지만 오래된 일기장처럼 그저 덮어두려고 한다. 나는 일기장의 단어처럼 따뜻하고 좁은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만의 속도를 책임지며 문장이 되어가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