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미움표

말의 미움표였다

by 이정우 글

옆면으로만 보던 입이 처음으로 나를 향해 열리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대답은 준비하지 못했고 촘촘히 스며오던 어지러움도 감당하지 못했다. 겨우 주저앉아 머리를 싸매고 기억을 저주하는 뒤늦은 순간에만 모든 말을 의미대로 들을 수 있었다. 감춰진 의미를 찾듯 신비로운 순간은 나를 그 자리에 멈춰있게 만들었다. 이제껏 나의 언어에서 새로움을 본 적은 없었는데 그 문장 부호 하나에 없던 호기심도 살아났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문장부호를 썼고 사람들이 쓴 문장을 보지 못해서 부호의 형태를 알 순 없었지만 소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로 어떤 부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음악을 들을 때처럼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을 배경 같은 소리에 귀기울여봐야지만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오랜만에 나에게 빈혈이 있는지 의심해보았다. 위태로운 이유도 주저앉은 이유도 나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모두 보는 시선이 정해져 있던 것 같아 표현이 일렁이는 순간이었다. 결국엔 나의 실수도 많았다는 생각으로 화를 누를 때면 앞에 선 사람은 내 표정을 구경하고 있었다. 질문이 오면 답을 하기까지 오래 걸리는 편이다. 좋은 대답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내뱉어보면 좋은 대답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따뜻한 말이든 차가운 말이든 듣지 않던 말이니 어지러워져서 나에게 빈혈이 있었는지 의심하게 된다. 그렇다고 병원에 가진 않을 것이다. 왜 아팠던 거냐고 묻는 질문마저 나를 더 어지럽게 만드니까.


병원에 가는 대신 내 방을 병원처럼 생각하기로 다짐하면 책이 청진기로 보인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책을 심장에 갖다대었다가 내가 떠올렸던 모양이 청진기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서 인터넷에 청진기를 검색했다. 말의 미움으로 포기된 순간들이 많아서 잊어버리는 중이었고 다행히 아직 그것까지 잊어버리진 않은 것 같았다. 책을 먼지가 없는 것 같이 보이는 곳에 다정히 던져놓고 체온기 같이 보이는 연필을 집어든다. 연필이 있으면 펼쳐야 되던 노트가 있으니 노트도 펼쳐본다. 이번엔 무엇에 비유할까 생각해보다가 귀찮아서 종이를 계속해서 넘긴다. 넘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손에서 놓아버린다. 갑자기 내가 없는 곳에 기다리고 있을 문장부호 하나가 떠올랐다. 이번엔 심장이 좀 뛰는 것 같이 느껴져서 쌓이지 않을 줄 알았던 먼지가 쌓인 책을 들었다가 놓아본다. 두 장소에 속하여 있으니 누군가 내가 이러고 있는 꼴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숨막히게 불안해도 의도하지 않은 먼지들은 털어준다. 그렇게 책상에서 홀로 놀다가 하루가 지났다. 해석하기 두려운 불안한 기억은 내일로 미뤄두기로 하고서.


시계를 놓은 건지 긴장을 놓은 건지 늦잠을 잤다. 익숙하게 도착 시간이 다 되어서 출발을 하고 모두 내일 할 말까지 준비해놓았을 때 가벼운 문이 살며시 열린다. 선생님 나를 노려보신다. 내일부터는 나의 선생님도 아니니 화를 보이진 않기로 한다. 선생님 왜 늦었냐고 묻는다. 아이들 몇 명에 나를 따라온 나뭇잎까지 나를 노려본다. 선생님 나라는 아이에 어이가 없었는지 가장 모범적인 아이와 가장 늘어져있는 아이를 동시에 쳐다보신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버릇 없는 아이가 되었다. 입을 굳게 다무는 것에도 이유가 있는데 한숨 쉬지 않는 것만으로도 미움은 다음으로 넘겨두면 안되나 생각했다. 다른 건 잘 미루니 나의 고민마저 미뤄둔 그 시간에서 해결하면 안되나 생각한 것이다. 가만히 시계만을 바라보다가 집에 갈 시간이 되고 유일하게 나와 문장부호 없이 대화해주던 친구에게마저 먼저 가라고 하며 가장 아픈 길을 걷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데 무언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작고 어린 아이는 나를 보며 웃는데 나는 웃을 수가 없다. 그런 아이에게마저 짖는 강아지도 나에게는 짖지 않아 주는데 나는 웃는 표정으로 바라봐주지 못한다. 그런 내가 참 나쁘다. (그런 내가 밉지는 않다...고 하고 싶었다)


진심 어린 조언이란 말엔 진심이 없어서 나를 스쳐갔던 모든 말을 가식으로 취급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나의 개인적인 우울은 너무 평범해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살아가라고 외치는 나와 남들처럼 해내라는 사람들의 말 사이에서 희망을 얘기하길 포기했다. 하고 싶던 말은 적어두지 못한 꿈처럼 흩날려갔다. 많은 이야기들 중에선 더이상 적고 싶은 꿈이 아닌 것들이 많았다. 꿈은 잊어도 금방 살아가니깐. 미움을 이겨내면 나를 가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다. 예쁘게 비친 나를 위해서.



'그럴 땐 그때를 떠올리지마'


나를 감싸려 내가 달고 살던 말에 효과는 떨어진지 오래였고 그걸 모른채 습관을 어기지 못하는 나는 말의 미움에 가라앉았다. 몇 번을 미움으로 찾아오던 것은 나에게 어떤 것을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대답을 하며 무너졌고 며칠을 앓음으로 찾아왔던 날엔 중요한 걸 느끼지도 못했는데 감사하다며 느낌표를 붙였다. 그저 표시해놓는 것은 쉬운 거니까 해야 할 일로 나의 부담까지 덜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딘가에 내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런 내가 작가가 되었다. 매일의 미움만으로도 부담스러워서 조금이라도 덜 부담스러운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오고나니 그곳에서 바라보던 부담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그 부담이 나를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 더 큰 부담이 될까봐 정하지 않았던 규칙을 정했다. 나는 나의 문제점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예전의 나와 나 같은 누군가의 무심함과 다르게 따뜻하고 조언이 참 구체적이다. 진심이 담긴 조언에 마음이 열리고 이제서야 표시하지 못했던 마음은 마음을 때리고 간 말의 미움표였다며 정리한다.


가끔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더 빠른 대답이 왔다. 질문도 상대방이 했고 대답도 상대방이 했다. 그래서 질문을 잊어버렸고 잘 기억나지도 않는 것을 나쁜 것으로만 정해두는 내 마음이 좁은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내가 직접 문장부호들을 세우는 사람이 되고보니 내가 마음이 좁은 것도 맞았고 상대방의 질문과 대답 모두 나쁜 것인 것도 맞았다. 질문도 대답도 아닌 것은 말의 미움표였다. 내 대답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은 더이상 대화로도 남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장 힘든 날에 희망 대신 찾아온 것은 말의 미움표였고 난 그것을 잊지 못해서 느리게 서성거렸다.


이제는 조금씩 미움들로 가득찬 시기를 지나가보려고 한다. 아픈 기억에서의 나를 밀어내려보려고 할 때마다 나중으로 밀어내는 것이 좋은 것일지 아니면 아픔에 머무는 게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일지 모르겠어서 기억을 불러온다. 기억이나 그때의 사람을 직접 보면 얼른 피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미움이 없는 곳으로 왔고 이제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대화가 있는 것은 분명히 좋은 것이었지만 중요한 말을 전해줄 것 같던 옆모습은 허공에 나를 향한 미움을 내뱉고 있었다. 가끔은 말이 없는 것이 나를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을 건드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가까이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렇게 어중간한 위치에서 내가 한 발짝 벗어나면 서로를 탓하다 멀어지게 된다. 미움은 없었으면 좋겠고 말은 없어도 좋다. 어떨 땐 지나간 것 같고 어떨 땐 아직인 것 같은 자리에서 말의 미움표를 저멀리 날려본다. 열린 이후로는 같은 말만을 반복하던 입이 기억 속에서 굳게 닫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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