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하라고 지은 이름
흔한 이름을 가진 사람일수록 삶을 주어진 형태대로만 살아간다고 느꼈다. 이름이 같은 두 아이가 모두 학교에 가기로 결정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름의 효과가 굉장하다는 걸 증명한다. 하지만 내 이름에는 그러한 효과가 없다. 연구가 진지해지지도 않은 가장 애매한 타이밍에 내가 나타나서 사람들도 내 이름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는다. 돋보기 안경을 썼는데도 말이다.
이름 자체는 평범한데 평범하지 않은 하루들을 자꾸만 보내게 된다. 사실 내 이름은 평범하다기보단 반듯한 것에 가깝다. 이정우라는 사람을 풀어헤치는 것보단 그 이름만을 한 겹 벗겨내 보는 게 쉬우니 사람들은 내 이름보다 이름의 뜻을 더 자주 물어온다. 그러면 나는 외워둔 한자어를 내뱉는다. “정치 정에 도울 우예요.” 이름의 뜻에 대한 해석은 항상 내가 아닌 질문을 걸어온 사람들이 맡아준다. 항상 이름을 소개한 후에는 뭔지 모를 여지가 남아있는 것 같아서 대답보단 질문을 들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깐이라도 나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질문 같이 느껴지는 대답에는 “정치인 되라고 지은 이름인가 보네”와 같은 단답형과 생각보다 매우 큰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말인 “그럼 성은 한자로 뭐야?”가 있다. “정치인 되라고 지은 이름인가 보네”를 듣고 나서는 내가 대통령이 되는 상상까지 해보았고 성씨를 한자로 묻는 질문에는 갑자기 나 자신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와 같은 시대와도 심히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름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상상의 여지를 만들어줬고 그것은 상상력이 되었다.
질문과 대답이 동시에 나오는 순간은 배움에 가장 열정적인 초입 이외에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아주 조용하게 초입을 맞았다. 여지를 채워 성까지 합체된 내 이름을 풀이해본다. “자두나무에서 정치를 돕는다” 성까지 붙여서 이름을 해석해보니 내 이름은 작명에서부터 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성까지 함께 내 이름이 불릴 때 마음이 상했었나보다.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 세 글자를 불러도 내 신경은 누군가 화를 불러낼 때와 같이 곤두서있었다. 잘 살라고 지어진 이름의 세 글자도 붙어있으니 논리적이지 않은 뜻을 내는 것을 보니 두 아이 사이에 갑자기 새로운 아이가 찾아오는 너무도 익숙한 풍경과 닮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확히 누구의 이야기였는지는 몰라도 새롭게 찾아온 아이를 먼저 맞은 아이는 원래 함께이던 아이에게 고정시켰던 눈길을 거두어 새로운 아이에게만 전해주었다. 내 일보다 더 아프게 관찰하던 그날의 풍경과 세 아이의 얼굴, 표정 모두 뚜렷하지만 이름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가장 뚜렷하던 부분이 잊힌 걸 보니 그 이름들은 머지않아 역사가 될 것 같다. 누가 기록해주지 않는 역사들이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일 것을 생각하니 들뜨면서도 그 들뜸이 무거워진다. 이름이 그토록 무거운 것인지는 처음 알았다.
요즘 나의 생활을 보면 어떤 날은 귀찮다며 누워있고, 어떤 날은 아프다며 누워있고,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며 누워 있는다. 좀 나아져서 자꾸만 끄적이는 지금도 내가 누울까 봐 불안하다. 아마도 다시 눕는다면 내가 눕는 것보단 나의 현실이 눕혀질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다. 여태껏 눕기만 해보던 사람이 눕혀지다니. 그것은 편하게 하던 걸 강제로 하는 것 이상의 아픔이다. 다른 정우는 어떤지 살펴보니 별 탈 없이 걷기도 하고 누워있기도 하며 잘 지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건 이름의 문제가 아니다. 매일을 집에서 보내며 관찰한 결과 다른 사람들이 느끼던 귀찮음과 내가 느끼는 귀찮음은 조금, 그리고 아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기약 없이 귀찮아서 귀찮으면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사람들은 그러한 귀찮음을 탓했지만 나에겐 귀찮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귀찮음쯤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 일어나기 시작하면 불안하다며 마음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지은 작명소에서 이름을 지은 사람들 중 사회적인 입장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들었을 때와 내가 누워있기만 해서 덜 느꼈던 불안함을 기쁜 들뜸으로 착각했을 때 나의 하루에 대해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땐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했고, 눈물과 한숨이 다 빠져나간 후 현실을 자각할 때 그제서야 내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그래도 이름에게 하는 이야기가 집 나간 아들도 다시 돌봐주는 따스함처럼 정말 따스했다.
예술가들의 이름은 대부분 특이한 이름이나 흔하던 본명까지 빛을 보게 만드는 예명으로 지어지는 것 같다. 사람이 특출나서 이름이 뇌리에 박힌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이름이 제자리에 있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별로 없어서 나의 이름을 예로 들어 되짚어보기로 한다. 내 이름은 이정우이다. 지금은 나의 것 중 가장 완성되어 있는 것이 이름인데 막상 그 이름을 소개하려 하니 내가 하고 싶은 말 중 가장 두서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 지금의 나의 이름은 꽤 흔한 이름에 속한다. 하지만 그만큼 같은 이름을 가졌어도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인지 나와 성까지 같은 사람들은 꽤 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귀찮지 않다면 잠시 손을 들어 네이버를 켜보자(브런치가 카카오의 소유인 것을, 그 카카오의 회사명은 다음카카오인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다음엔 다음으로 검색해야겠다)
아무튼 네이버에 이정우를 검색하면 무려 68명의 인물들이 나온다. 너무 많아서인지 컴퓨터로 검색했을 때는 20명으로만 추려서 보여주는 것 같다. 이정우를 검색하고 느낀 점은 ‘다양하다’라는 다양한 감정이 아닌 그저 나이는 많은데 가장 젊을 때의 사진으로 등록된 사람들이 많다는 찾으려 하지 않아도 보이는 점 하나였다. 그리고 좀 더 무엇이든 찾아보려 하면 알 수 있는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들은 sns를 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sns를 팔로우하진 않을 나라서 그 사람이 모든 것을 나타나기 이전의 상태(비공개)로 돌려놓고 숨는다면 나는 작은 관심마저 접어둬야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게 궁금한 것 앞에서도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않은 나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용기가 없고 내 이름에 대한 정이 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와 이름이 비슷하거나 같은 수천 명, 수만 명만큼을 미워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찾고 싶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찾지 말라는 듯 연락처 하나도 적어주지 않고 간다. 무심결도 아니라 그저 아쉬워하다 보니 지나쳐버린 절차겠지만 그 때문에 아쉬운 사람이 한 명 더 생기고 말았다.
이번엔 간추려진 20명의 사람들 중 배우 이정우가 가장 눈에 띄었다. 1971년생의 배우 이정우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데뷔했는데 이 영화 제목이 익숙한 것은 영화를 봐서도 성적은 완만하지 않아도 행복하고 싶은 내 심리와 같아서도 아닌 몇 달 전에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배우 김보성이 본명으로 이 영화에 출연했었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스쳐가는 한 장면이었는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에 출연했음을 밝히는 한 마디와 같은 영화로 데뷔했음을 밝히는 프로필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보다 10년 이상 늦게 태어난 1985년생의 배우 이정우는 농구선수 출신으로 선수 활동을 하면서도 연예인 제의를 받아왔다고 한다. 농구에 집중하기 위해 제의들을 거절했지만 다리 부상을 겪었고 결국 농구를 못하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힘든 시기까지 보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나오자 빛과 같은 새로운 것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 새로운 것이 바로 그에겐 연기였다. 데뷔작의 경우에는 편집작업을 거치며 출연분이 삭제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와 이름이 같은 그는 그 자체만으로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쾌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내 생각에 그가 느낀 쾌감은 카메라 앞에서 느끼는 쾌감도,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쾌감도 아닌 대중 앞에 섰을 때의 쾌감이었던 것 같다. 어떤 일은 준비하기만 해도 시작이 되듯 그는 장면을 촬영하는 그 순간이 대중 앞에 서게 되는 자신과도 닿아있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모든 과정들이 몇 년이라는 정해진 시간 안에 흘러갔겠지만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아픔을 밟아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일어선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이름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어딘가에라도 새기고 싶은 이름이 있기에 친구에게 잊혀지는 것마저 두려운 세상에서 기억되겠다는 꿈을 꿀 수 있다.
내가 나를 알리는 것은 쉽기에 더 어렵지만 내가 내 이름을 알리는 것에는 뛰어넘어야 할 명확한 목표가 있다. 첫 번째는 정우는 유명하지 않은데 정우 어머니는 유명한 이 상황을 바꾸는 것이다. 엄마의 인지도는 그대로 두고 그 자주 불리는 정우가 나라는 걸 소개한다면 우리 엄마에 대한 인지도와 나에 대한 인지도가 한 번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정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유명해지는 일이다. 네이버 인물정보 등록이라는 게(또 다음이 아닌 네이버를 사용해버렸다) 생각보다는 꽤 쉬운 듯하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모든 등록된 인물들을 사람들이 다 찾지는 않는 것 같고 찾고 싶어도 나와 같이 68명 중 20명만 요약해서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수많은 이정우 중 가장 유명해지는 방법은 그들 중 가장 나은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이정우 같지 않은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다. 이름과 가장 안 어울리던 얼굴들이 인식된 이후로는 그 이름에 가장 걸맞는 얼굴이 된다. 1985년생 배우 이정우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던 그 순간이 기뻤음에도 내가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장면이 편집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편집된다는 건 개인보다 그 과정도 결과도 아예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 아쉬운 일인 것 같다. 그래서 1971년생 배우 이정우도 1985년생 배우 이정우도 어딘가에서 나처럼 수많은 이정우 중에서 가장 유명해지길 바라고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