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공백은 숫자 세기와 숨 참기가 채우고 있었다

기다리는 마음과 찢겨진 것을 메우는 마음은 닮은 점이 많다

by 이정우 글

만약이라도 한 번만, 정말 한 번만 더 감수해보자고 할 때 사람은 앉아있게 된다. 그럴 때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적은 없는 것 같다. 개인이 차지하고 싶은 자리라면 기대치를 높게 잡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그것을 놓게 된다. 그저 시간이 흘러간 것인데 서로가 만나거나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있다. 정각이라는 뾰족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어쩌면 가장 위험한 도시이다. 하지만 그 위험한 도시가 없다면 약속이 생기지 않는 정각과 정각 사이의 시간을 그저 기다리는 마음으로만 보내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기다리는 마음과 찢겨진 것을 메우는 마음은 닮은 점이 많다.



한 번 시도하는 것을 도전만으로 보는 건 나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찢겨진 것을 메우기 위해서는 그 아픔을 모두 모아야 한다. 아픔은 의외로 똘똘 뭉쳐있지만 나는 그들과 단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가슴이 시야를 답답하게 만들 땐 바닷가 여행을 생각해보았다. 시간을 잘못 맞으면 갯벌을 보게 되는데 그 갯벌에 빠져드는 사람은 옷을 준비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을 준비한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나와는 아주 먼 생각이라 생각하며 생각했다. 내가 떠올린 바닷가는 가 본 곳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바다에 가 보기 전에 들려줬을 바다 이야기로 기억하게 된 것이 바다였다. 그래서 나의 첫 바다는 모래알이나 바위 등이 아닌 물과 물고기로만 기억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엔 판단력도 급박했는지 내가 물고기를 볼 수 있는 장소는 바다가 아니라 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분명 누군가의 재촉도 있었을 테지만 바다의 이중적인 면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바다보단 먼저 강을 이해했다. 갯벌을 늦게 알게 되었으니 시간에 따라 물이 사라지고 다시 채워진다는 규칙 같은 것도 나는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갯벌의 찐득한 뻘을 해변의 부드럽던 모래가 젖은 것으로만 생각했으니 갯벌이라는 장소를 다른 사람들보다는 덜 더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갯벌에 갈 때는 아끼지 않는 옷을 챙겨가야 한다는 마음의 안전수칙도 있었지만 나는 어떤 옷을 아끼고 어떤 옷을 놓을 수 있는지 자체를 구분하지 않으며 지냈다. 내복과 외출복 모두 나를 위한 옷이었고 내복에는 추웠던 바깥의 나까지도 따뜻하게 데워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때의 나에겐 춥기에 따뜻해질 수 있는 마음이 있었다. 그저 내 마음에 들어오는 옷은 매일 입으며 지냈기에 옷의 단조로움이 나를 해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같은 바다만을 보지 않는다. 그러니 남이 내게 하는 숱한 조언들도 나를 향한 얘기가 아닌 것이다. 숨통이 트여야 하는데 그저 한 번 긴 숨을 쉰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호흡이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안고 있었나 보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억지로 대화를 피한다거나 말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를 잘하면 다른 것도 잘 할 것이고 일상은 분명히 잘 보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과도 비슷한 것 같다. 나는 내가 봤을 때만 잘난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예상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모두에게 잘난 사람들이 더욱더 많이 존재할 텐데 그 중 일부만 본모습을 드러내려 하는 것을 보면 뭐든 잘할 거라는 예상은 예상보다는 예언에 가깝다. 그 예상 때문인지 나는 기회처럼 다가온 대화들에도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슬픈 소리지만 코로나19 이전부터 거리두기를 해왔다.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대화를 잘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다. 상대에겐 핑계라는 가벼움으로 여겨지고 내겐 시간이라는 무거움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통 말을 안 할 때엔 위와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숨통이 트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감상적인 불만이나 사람들은 내가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불편함 때문일 거라고만 생각하고 왜 그런 나를 불편해하는지 생각하다보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대화로 묶어놓은 모든 시간들도 결국엔 시간이었다. 사람들의 대화가 무르익을 동안 마음을 다잡도록 시간을 잠시라도 멈춰두고 싶었다. 마음 한 켠에서 외로운 관계의 끈을 놓는다면 당장에 확보되는 시간이 많아서 희열을 느낄 것이다. 시계를 바라볼 때에도 급해지지 않고 하고 싶은 것 몇 가지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쾌감이라는 말로만 표현할 수 있는 유쾌한 것에 속하지만 함께 있어도 늘 혼자였던 사람들은 시간을 잘 보내지 못했다는 것이 억울하다. 그래서 나는 돌아서면 캐릭터 같은 표정을 짓는다.


외국 애니메이션들에서는 미소나 우울이 아닌 표정, 그리고 감정이 많이 비춰진다.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5시간 전만 해도 한식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포크를 들고 먹었다면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 선천적인 특징 때문에 포크로 사람을 찔러버릴 수 있겠다. 아직까지도 밥상머리 교육이 유행이다. 젓가락으로 맞은 사람, 젓가락으로 안 찌른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포크처럼 날카로운 것을 아기일 때부터 썼다면 밥 먹을 때 쓰는 물건은 밥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물건과 거리 두지 못하는 마음도 선천적이라는 게 자책감을 불러왔다, 그런 자책감을 보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한국스러운 대화가 여럿이었다. 대화가 찾아오면 나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수많은 작가들이 완전히 혼자일 때 겪는 감정은 외로움이 아닌 고독이고 사람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알게 되는 공허함이 바로 외로움의 민낯이라는 걸 말해왔다. 나와 관련된 것이 없는 것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 나와 관련된 것이 힘들고 고된 것이 오히려 외로움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무심코 지나쳤을 혼자이고 싶은 순간들이 외로움 그 자체였을 수도 있겠다. 이 사실이 나에게 공감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저 몇 명이라는 것이 내겐 너무나 하대한 군단 같이 보여서 어쩌면 세상의 단어들이 단순하기에 세상의 대화들까지 단순해진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도 대화는 즐겁다. 나는 평소엔 잘 찾아오지 않는 질문이 찾아온 만큼 공들여서 대답하고 싶었다. 정말 좋은 대답이 떠올랐더라도 3초에서 5초 정도는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떨릴 때는 1에서 5까지 숫자를 세며 타이밍을 기다렸고 설렐 때는 나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숨을 참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방송은 송출되었고 금세 채널이 돌려졌다. 내 머릿속 아나운서는 꽤 많은 돈을 받는다. 그 돈을 누가 주는진 모르지만 가끔은 살아있는 게 느껴져 공허하게 아프다. 아나운서를 위한, 아니 방송국을 위한, 어쩌면 나를 위한 직업이 숫자를 세고 꿈이 끝나듯 모든 장면이 끝나버린다. 대화가 왜 끝났는지는 모르겠다.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는 대신 대화의 공백을 무언가로라도 채우려 한 것 같다. 그 무언가에는 항상 숫자가 빠지지 않았다.


나에겐 대화의 공백 자체가 너무 많았다. 미련하게 대화를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기다렸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수많은 날씨 속에 사람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나는 대화에서 곧잘 대답하는 편이었다. 나의 대답률은 100%였고 상대의 질문은 두 개를 넘어가지 않았다. 보통 대화는 멀리서 보아도 산만해 보일 만큼 격하거나 멀리서 보아서 삭막해 보일 만큼 사소하게 보이는 것인데 그런 시선을 가진 나의 현실에서는 대화라는 것 자체가 잘 등장하지를 않았다. 나와 비슷한 사람일수록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게 된다. 서로가 대화를 나누면 그저 마주하는 사람 이상이 될 것이라는 환상이다. 어떨 땐 숨을 참듯이 대화를 참던 순간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설렘이 아닐 때엔 잘 참아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갈수록 평범한 대화를 많이 하게 되었다. 영화 대사나 사람들의 대화도 텍스트로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나의 대화는 편견과 시선이 미뤄둔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만 덜 초라했으면 하고 바라는 남의 대화가 나의 대화보다 덜 초라하다. 나는 오늘도 공중에다 혼잣말을 던져둔다. 그 말은 상대가 없음에도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 같다. 누가 들을 것 같아서 문장은 내뱉지 않는다. 그대로 대화 없이는 마음껏 당당하지 못하겠다.


대부분 숫자로 된 것들은 매력이 없고 진부하다고 느낄 때가 여럿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새해를 맞기 위해 제야의 종이 울리는 걸 기다리는 것, 야구선수가 딱 떨어진 숫자만큼만 경기에 출전을 해도 기념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들부터 생일이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보여서 숫자가 별로라고 이야기하진 못하겠다. 요즘엔 집에서 하는 생일파티가 아니면 케이크를 준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는 적은 대화 탓에 아무도 없는 생일을 슬프고 너그럽게 맞이할 수도 있었겠지만 생일만을 위해서 모여주는 친구가 꽤 있어서 매년 생일을 대화와 함께 보냈다. 생일을 어떤 분위기 좋은 식당보다도 케이크와 함께 맞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분위기 좋은 식당이더라도 이벤트처럼 케이크가 등장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중요한 순서를 빼먹은 것 같다. 숫자를 꽂고 여러 번씩 불어내는 과정이 빠지니 괜시리 섭섭해진다. 나는 케이크를 살 때만 내 나이를 당당히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촛불이 없는 때에 나이를 물으면 섭섭함을 넘어 내가 나의 한 가지를 삐걱거리게 만든 것 같다. 내게 숫자가 콤플렉스처럼 여겨지는 것은 나이에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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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숫자를 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 되어버린 것 같다. 숫자로는 문장이나 기억을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단지 숫자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것을 보니 당연하게 나보다 숫자의 위치가 높은 것 같다. 웬만해선 따라잡을 수도 없는 위치에 숫자가 그려져 있다. 이런 게 누군가에겐 별로일 수도 있겠다. 숫자 중 가장 뒷자리로 밀려본 사람이라면 숫자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숫자에 경악하고 말 것이다. 나도 가끔은 사람보다 숫자를 질투할 때가 있었다. 약속을 시간이나 날짜로 정해두어야 한다는 게 치사했고 그것마저 어기는 나는 더 치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더 빨라지려 한다거나 그저 포기하고 여유를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게 그저 숫자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한 겹씩 생겼던 아픔의 감정들이 사라진다는 건 잊혀지는 일이기에 너무도 힘들겠지만 그 시간마저 숫자가 되기에 낯선 것들까지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숫자로 정해진 것들은 마음껏 범접할 수 있기에 스트레스는 유발해도 고통은 유발하지 않는 가장 친한 친구와도 같다.


결국 소심한 아이는 친구가 많기를 바랐다. 마음껏 기다리며 이 기다림은 내가 시작한 것임을 인정했지만 정확한 숫자를 정해놓지 않았기에 아이는 해가 지고 친구는 안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럴 때 대화가 있었다면 오는 친구를 기다리는 것뿐이라고 대답하겠다. 여기까지만 해도 아이는 여러 번의 대화를 했다. 한 명씩 천천히 마음을 터놓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데 아이는 친구보다는 그저 말동무가 필요했던 것 같다. 보통 걸어가는 게의 사진 뒤엔 게를 먹으려는 바닷새의 사진이 있었다. 먹히고 먹히는 것이 아니라 한 쪽만 먹히는 것이 자연인 것이다. 나는 그 두 개의 사진에서 모두 게만을 집중해서 노려보았다. 안타까운 것일수록 눈에 힘을 줄 수밖에 없는 구경의 안타까움과 닮아있다. 아이는 다른 곳에 힘을 주었다. 아이가 힘을 준 곳은 생각이었다. 아이에겐 달력이, 마주선 다른 아이에겐 시간이 다가왔다. 더 아쉬운 사람이 말을 걸었고 소심한 아이는 숨을 고르고 말도 고르며 몇 초를 보냈다. 한 아이는 몇 초가 너무 아쉬워서 친구가 되지 못했고 다른 한 아이는 몇 초가 너무 안타까워서 친구가 되지 못했다. 아이는 알았을까···. 안타까운 건 많지만 그것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순서가 되어버릴 경험들이 찾아온다는 것을.


이제는 기다림의 감정과 혼자서 메워보려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기다림 속에는 내가 더 많고 더 넓은 미래 속에 살기 위해 기다린다. 평수마저 정해져 있는 건물들을 오고 가며 혼자라는 씨앗은 세상에 박힌다. 이 과정들을 짧은 시일 내에 끝나는 사람들이 많으니 모두를 육상선수나 평범한 회사원으로 불러야겠다. 쓰기 싫은 문장들 속 가장 쓰고 싶은 문장을 쓰는 지금도 몇 초간은 숨을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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