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분들은 머리숱이 없다

강렬한 것을 표현하려 애쓰기보단 삭발이란 행동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by 이정우 글

심심해서 중학교 시절 환경 교과서를 풀어보았다. 환경을 원 안에 있는 단어들 중 하나를 골라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혼자서 무엇이든 한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건 내 생각을 더 좁게 만드는 지름길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것 같아 생각을 줄이려 하면 그 속에서도 괴로워하는 나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지만 나는 확실히 동물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자주 인간과 비교되었던 원숭이나 곁에 있는 반려동물들을 보면서 사람도 동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텐데 나는 그런 육지 동물보단 해산물에 가까운 것 같다. 어둠에 잠긴 생각에서 벗어날 때마다 며칠간의 내 머리가 심심풀이 오징어의 머리 모양과 비슷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남들은 다 아는 사실을 가끔씩 잊어버리는 편인데 그게 정말 잊어버리기도 어려운 것들이어서 나 자신도 놀라게 된다. 최근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자 이제 오징어라는 해산물이 국내를 넘어서 해외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해외에선 오징어를 요리에 잘 안 쓰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도 먹어볼 가능성이 없는 동물들을 알고 있듯 오징어를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이 생각에까지도 닿지 못했고 한동안 오징어란 것을 아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세계가 바다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도 서로 너무 다른 언어 때문에 잊고 있었나 보다.


아무리 자만은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이라지만 몇 주 동안은 나에게 보일러를 쓰는 것이 아까워서 한겨울에 보일러를 끄고 지냈었다. 거기엔 내가 오징어의 해외진출 같은 생각을 했던 것도 한 몫했다. 처음엔 에너지도 아끼고 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도 부딪히며 상처받지 않게 아껴둘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며칠이 몇 주로 넘어가니 내 마음은 파업하는 마음이 되어갔다. 몇 주간의 보호가 나를 텅 비어버리게 만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에너지를 아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선 에너지를 잘 쓰는 것이 중요하다. 실컷 뛰고 와서 하는 샤워는 빠르면서도 상쾌하지만 아끼며 살금살금 걷다 들어오면 의무적인 샤워를 하게 된다. 의무적인 샤워여서 시간이 짧을 것 같지만 샤워에 우울한 감정이 더해지면 시간은 금세 늘어나게 된다. 많이 뛰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난 샤워를 오래 해서 샤워를 잘 하는 사람은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오래 가져왔었다. 오래 걷거나 뛰는 사람들도 그런 마음이 들 것이다. 계발이 아닌 행동을 했을 때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 행동을 간결하게 끝내버릴 수밖에 없다.


가끔은 휴지를 아끼기 위해서 눈물 흘리지 않기로 다짐하는 때도 있었지만 슬픔을 더 오래 생각하다가 음료수를 입이 아닌 옷에 부어버려서 내 옷을 좀 더 꼼꼼하게 닦고 세탁까지 해야 했다. 어떨 땐 세탁소에까지 맡기게 됐었다. 휴지뿐만 아니라 예상 못한 세제와 돈까지 쓰게 된 것이다. 휴지 하나 아끼려다가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그럴 때 옷을 버렸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예전엔 정말 깊은 얼룩이 배이면 세척만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세제회사와 세탁기회사, 동네세탁소 모두 그 얼룩을 제거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선택의 여지가 많아졌으니 그 중에서 가장 저렴하거나 화학성분이 첨가되는 일이 적을만한 대안을 선택할 것이다.


환경을 아끼는 것에 있어서도 그럴 필요가 있다. 마라톤으로 희망을 전하기 위해서는 주최자들 중 일부의 희망 없는 야근도 존재하게 될 것이고 기념식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무단 쓰레기들이 투척될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이 이름에 들어가는 여러 마라톤들은 어떤 희망을 제시하려는 걸까? 이름엔 환경이 붙지만 그냥 달리는 것에만 의미를 두는 듯한 마라톤들도 있고 환경과 관련된 활동과 마라톤을 동시에 하는 행사도 있다. 대부분 행사가 끝난 뒤를 보면 뒤처리하기도 힘든 곳에 생수병들이 버려져있었다. 환경 마라톤이라도 환경적인 요소가 들어가는 일은 없다. 그것은 그저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끄덕임일 것이다. 환경을 지키느라 지체되어야 하는 발전들이 많다는 걸 몰라서 모두 발전의 반대편에 터를 세운 것이 아니란 것을 약간의 오염을 허용하는 보존을 통해 보여준다. 지속될 발전 옆에 터를 세운 사람들과 똑같이 환경을 위하는 사람들도 계속해서 이 땅을 이용해보겠다는 의지가 있다. 그래도 쓰레기는 좀 덜 버리면 좋겠다.


그렇다면 표현의 최고봉인 삭발도 절대적인 사람들이 머리숱이 많아서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모발적인 관점에서 굉장히 별로다. 숱이 적은 머리는 그대로 두는 게 낫다는 말은 그 분들로 인해 생긴 말일 것이다. 고개 숙일 때의 인사가 완전한 복종은 아니라는 뜻을 짧은 인사 사이에 새겨두기엔 인사가 너무 가늘고 짧다. 때론 상대방이 제대로 인사를 받아 들여주지도 않는다. 인사는 반복되는 것이어서 서로가 불편하지 않도록 틀을 잡아둬야 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말로 표현하게 되면 미래를 보장할 수가 없다. 말은 행동을 잃게 만들고 그게 절대적인 분들이 몸만 돌린 채로 써보는 속임수이다. 그럴 땐 적은 머리숱일수록 표현에 유리하다. 순간적으로 절대적인 자 본인의 머리숱을 떠올리게 하여 한 방 먹일 수도 있다. 어느 마라톤들은 시위보다 더 강렬한 뜻을 내포해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위보다 강렬한 것을 표현하려 애쓰기보단 삭발이란 행동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모일 수 없다면 반대로 최대로 적은 수의 표현을 밀고 나가야 한다. 이게 맞나 싶은 것들이 세상을 바꿔왔고 꾸준히 절대적인 사람들이 인구가 사는 세상을 변두리로 몰아왔다.


이젠 절대적인 위치에서의 답변이 없어도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더 이상 확성기는 필요하지 않고 분노에게 기다림은 없다. 언젠가 사람 대 사람으로 맞붙는 날이 오면 견고한 계급이라는 기준들도 금세 무너질 것이라 생각한다. 애초에 한쪽만이 가지고 있는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환상이 지켜짐으로써 동등함에 대한 환상도 동시에 지켜졌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대화를 하기 위해 마주 앉았을 때, 아니 앉기도 전에 예상보다 거대하지 않고 작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체구를 마주칠 것이고 사람들이 재벌이나 정치인은 어떤 욕을 쓰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다음 단계는 머리채 잡기인데 모두들 누가 뜯겼을 때 더 불리한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절대적인 사람에게 착함보단 오래 일하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길 원할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대적인 사람들의 머리숱과 머리 스타일에 집중한다. 머리카락이 달라진 걸 발견한다는 것에는 그만큼 그 사람의 머리카락이 적어지길 바랬왔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


누군가에겐 좀 별로이고 누군가에겐 소중함일 나와 같은 사람들은 오징어 같은 삼각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지식으로 무시 받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기에 그 부분이 없어도 맞설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주변을 밝히는 방법을 찾아내더라도 어두운 곳에서 온 것이라며 무시받을 뿐이라는 것과 무시의 순간은 짧기만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대 맞은 아픔만큼의 행복은 없을 거란 걸 알아서 통증이 잊혀질 때까지 극복하고 그 와중에 나에게 찾아온 다른 문제들까지도 극복한다. 기존의 지식과는 상대하지 않는 삶을 살기에 그러할 수 있고 이 생활이 풍성한 머리숱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머리숱에 신경 쓸 귀중한 시간엔 닿지 못하지만 항상 부드럽지 못하더라도 풍성한 모발을 가지고 있다. 머리카락의 부드러움에 신경 쓸수록 머리카락은 메말라갈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다면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고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 자신의 이미 적은 머리숱에 신경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스트레스나 젊음을 맞바꿈으로써 사라진 머리카락들은 흩날리면 안타깝지만 여러 명을 삭발하게 한 머리카락은 존재 자체가 푸석하다. 어쩌면 절대적인 분들은 머리카락을 통해 강제적인 반성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절대적인 사람의 머리숱은 절대로 절대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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