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유내강의 영화

<파워 오브 도그>(2021), 제인 캠피언

by Yul

미국 몬태나에서 대규모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필(베네딕트 컴버배치)과 조지(제시 플래먼스) 형제는 돈독한 사이다. 그러나 어느 날 과부 로즈(커스틴 던스트)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 눈이 맞은 조지와 로즈가 필 몰래 결혼하게 되면서 형제 사이엔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결혼의 대상과 과정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필은 곧 로즈와 그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에게 적대심을 드러낸다.


토머스 새비지의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제인 캠피언의 <파워 오브 도그>는 20세기 초 서부극의 풍광을 여과 없이 담아낸 드문 작품이다. 온통 황무지와 풀로 뒤덮인 그 세계는 원작 소설의 자세한 설명문을 그대로 체화한 듯 정교하게 느껴지면서도 서부극 특유의 마초적인 환상을 최대한 배제해 소재를 다루는 영화의 태도에 대한 신뢰를 준다. (이것은 이 영화를 연출한 제인 캠피언이 여성 감독이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넘실거리는 바람 가닥과 구름의 그림자가 모두 드리우는 그 땅의 평화롭고도 서늘한 기운을 모두 마주하고 있다 보면, 이 영화의 풍광은 그 자체로 인물의 마음을 그려낸 세밀한 풍경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워 오브 도그>의 인물은 그 풍경화를 읽는 자와 읽지 못하는 자로 구분된다. 필은 피터가 서부의 마초적이고 거친 세계에 대해 배우던 중 그림자 진 언덕에 대해 무엇이 보이느냐는 질문에 곧바로 "짖어대는 개"라고 말하자 매우 놀란다. 그건 그와 함께 일해왔던 다른 카우보이들은 아무도 그 언덕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1900년부터 1925년까지 정확히 25년간 필과 함께 일해온 조지 또한 알지 못했던 것을 피터는 바로 보아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터가 그 풍경 속 으르렁거리는 개를 알아본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그의 이전 세대엔 이미 그것을 포착한 필과 그의 스승 브롱코 헨리가 있었으니까.


필과 브롱코 헨리의 관계는 소설에서처럼 영화에서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지만, 눈치챌 수 있는 단서는 영화 곳곳에 매설되어 있다. (영화에 비해 소설이 좀 더 간접적이면서 암시적이다.) 안장을 닦는 필의 맨손이나 밧줄을 만들 때 허리를 이용하는 모습을 클로즈업 인서트로 삽입하는 장면은 심상치 않다. 이건 결국 성적인 맥락을 극 속에 길어와 필과 브롱코 헨리 사이를 추측하도록 만드는 장치인 것이다. <파워 오브 도그>에서 쌓아뒀던 나무 더미는 하나씩 땅에 박히고 남성의 나체가 그려진 잡지는 감춰지며 씻지 않는 것을 통해 남성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사람은 가려진 호숫가에서 몰래 자위한다. 그리고 필은 "알몸으로 잤냐"는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못한다.


필은 아마 동성애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승마 스승이었던 브롱코 헨리는 아마도 그 동성 관계의 상대이면서 동성애에 대해 눈뜨게 해 준 스승이었을 것이다. 피터는 과거의 필이었을 것으로, 필은 과거의 브롱코 헨리였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필은 피터를 적대시하는가. 로즈와 조지의 관계에 불만을 품고 있다면 아예 그들에게 대응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필은 로즈와 피터에겐 적대적인 관계를 이루는 반면 조지에게는 그렇지 않다.) 과거 브롱코 헨리와의 사랑 관계를 가로막은 세상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면 그 세계 자체와 싸우는 것이 옳지 않은가. 왜 그가 싸워야 할 상대는 그 마초적인 세계 자체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더구나 그 상대가 굽이진 산 사이 으르렁거리는 개를 보아낸 자라면, 이건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파워 오브 도그>가 바탕으로 하는 시공간적 배경은 1925년 미국 몬태나다. 동성애가 금기로 규정되며 금지법까지 있었던 시대에, 더구나 자신이 강함을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거친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까지 한다면 이 영화에서 동성애의 위치는 확고해 보인다. 그건 이뤄질 수 없으면서 들키게 되면 모든 관계가 망실되는 종류의 사랑인 것이다. 때문에 필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초이즘에 몰두한다. 그러나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필은 애초에 강한 사람이 아니다. 동성애자인 필은 시대적 배경에서 성소수자로서 약자의 위치에 서 있고, '~처럼 보이고 싶다'는 심리를 뒤집어 말하면 결국 자신에겐 그렇게 보이고 싶은 '무엇'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필에겐 '강함'과 '남자다움'의 가치가 그렇다.) 필은 재미로 토끼를 잡던 중 갈대에 묻은 혈흔을 보고 토끼의 것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피였다. 필은 악하기 이전에 약한 사람이고, 결과적으론 약해서 악해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상대적 강자인) 부성 대신 모성을 옥죄고, 사회 시스템의 뿌리에 있는 강자들이 아닌 그 아래에서 탄압당하는 약자들을 공격한다. 이 영화 속 최고의 장면이 필과 로즈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영화가 다루는 싸움의 구도는 강자와 약자의 싸움이 아니라 약자와 약자(처럼 보이는 자)의 싸움이다.


강자의 위치에 올라 있는 사람은 철저하게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의 행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킨다. 그럴 때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인물의 마음과 심리의 동선이 하나 되어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로즈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는 조지의 부탁을 듣고는 연습에 몰두한다. 처음에 이 장면에서 카메라의 주도권은 로즈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카메라는 그녀가 연주할 때마다 서서히 줌인한다. 그녀가 연주할 때면 카메라는 움직이고, 거듭 멈칫하며 버벅거릴 때면 다시 멈춘다. 카메라는 연주자의 심리에 동화되어 그를 따른다. 그런데 필이 찍어 누르는 듯한 위압감의 밴조 연주로 로즈의 피아노를 압도하기 시작하면 카메라의 주인은 바뀐다. (이 장면에서 로즈는 2층에서 내려다보는 필의 시선으로 찍힌 반면 필은 우스꽝스럽다 싶을 정도로 과격한 로우 앵글 속에 담겨 있다.) 필의 밴조가 로즈의 피아노 사이로 틈입하며 제 소리를 높여갈 때, 그 소리를 눈치챈 로즈가 떨며 연주를 멈추자 곧바로 들려오는 밴조의 독무대가 펼쳐질 때, 피아노 연주와 하나였던 카메라의 움직임은 밴조로 옮겨가고 필은 로즈의 불안정한 마음을 그야말로 한 손에 휘어잡는다.


그렇게 저녁식사를 망쳐버린 후 벼랑 끝에 몰린 여자는 술에 의지하기 시작하고 이제 그 약한 아들과 둔한 남편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성가셔 보이는 아들만 적당히 잘 구워삶는다면 모든 관계가 끊겨 버린 여자는 술에 자멸하게 될 것이며 그 지긋지긋한 결혼 생활도 곧 구두점을 찍게 될 것만 같다. 필은 그야말로 로즈와 그 주변의 관계들을 모조리 끊어내려고 한다.


처음에 필이 피터에게 접근한 이유는 로즈로부터 그의 아들을 떼어내 심리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마 모든 관계에서 단절된 상황에 놓이게 한다면 여자의 중독 증세는 더욱 심해질 것이고, 결과적으론 조지와의 이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중반까지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갑자기 호의적으로 바뀌는 필의 뒷모습엔 교활한 웃음이 숨어 있다. 그러다가 피터에게 산 풍경 속 으르렁거리는 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때 모든 것이 변한다..


그런데 필은 이미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먼 옛날 브롱코 헨리가 그에게 얘기해 줬던 것과 같다. 굽이진 산속에 그림자가 지면 짖어대는 개의 모습이 보인다는 이야기. 하지만 같은 말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듣고 말하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브롱코 헨리와 피터의 이야기는 그 지점에서 명확하게 다르다. 이 영화는 대사로 암시되는 세대까지 포함해서 총 3대를 다루고 있는데, 그중 정가운데 두 번째 세대에 위치한 필은 그의 위 세대와 아래 세대로부터 차례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럴 때 세대나 핏줄은 물처럼 흘러내려 거스를 수 없기에 위 세대의 이야기는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전달된다. 필은 위 세대인 브롱코 헨리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에 산속의 개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아래 세대인 피터에게서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소통의 흐름 때문에 위 세대의 말이 교육과 학습의 의미를 담는다면, 아래 세대의 말은 자아 표출로 다가온다. 이제 그 중간에서 두 이야기를 고스란히 듣게 된 필은 피터가 브롱코 헨리와 같을 것이라고, 자신과 같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서로 다른 세대 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가 자신과 같은 종류의 사람일 것이라고 믿게 된 필은 이제 피터를 잇고 싶어 한다. 이와 관련해서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소품은 밧줄이다. 필이 피터에게 (선의던 악의던) 본격적으로 다가가려 하는 5장부터 필은 피터에게 밧줄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 앞에서 직접 만들기까지 하면서 거듭 강조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밧줄이 만들어지는 방식인데, 우선 튼튼한 밧줄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소가죽이 필요하다. 그다음 서로 교차하며 엮고 땋아야 밧줄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동성애자인 필이 피터에게 드러내는 동질감의 표현이면서 연대의 의미를 함축한 물건인 셈이다. (<기생충>에서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 사이에서의 믿음을 나타내는 소품으로 ‘믿음의 벨트’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을 떠올려 보라.) 아마 필이 매년 무망하게 태워버리는 가죽들은 언젠가 피터와 같은 사람이 나타났을 때 밧줄을 만들어주기 위한 재료였을 것이다. 조지는 이에 “어차피 태워버렸을 것”이라며 지레짐작한다. 하지만 필은 이제 피터를 만나게 되었으므로 로즈가 가죽을 인디언들에게 팔아버리자 분노한다.


필과 피터의 관계는 서로 동성애라는 키워드로 읽어낼 수 있지만 동시에 유사 부자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워 오브 도그>가 원작을 각색해 내는 데 있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피터의 아버지, 그러니까 로즈의 남편이었기도 한 의사 고든에 대한 에피소드를 통째로 비워냈다는 점이다. 로즈와 필, 피터의 질긴 악연의 첫 고리를 꿰는 이 에피소드는 이어질 일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감을 갖게 하는 동시에 소설 전체에 배어 있는 황량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극 중 이 사건은 단 한 차례 언급도 되지 않은 채 철저하게 괄호 쳐진다. 심지어 피터가 필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딱 한 번 말할 때마저 고든이라는 이름은 언급되지조차 않는다.


또한 법률상 피터의 (새) 아버지가 조지임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이 한 번도 같은 프레임 안에 잡히는 순간이 없다는 사실은 결국 이 영화가 필과 피터를 일종의 유사 부자 관계로 삼고 있음을 드러낸다. (피터에게 필이 유사 아버지이듯, 필에게 유사 아버지는 브롱코 헨리었을 것이다.) 인물 간 사이를 (유사) 가족 관계로 풀어낸다는 것은 곧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건 위 세대로부터 내려져오는 관습과 편견을 끊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아래 세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위 세대는 자신이 지켜온 규칙과 관습을 대대로 물려오며 연대와 상속의 밧줄을 함께 이을 것을 요구한다면, 이제 그 아래 세대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피터는 과연 필에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피터와 필의 서로 다른 태도 차이를 나타내는 대목은 서로 나란히 앉아 나누는 대화 장면이다. “피부가 카우보이답게 탔네”라며 말을 떼기 시작하는 필은 곧 오래전 브롱코 헨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불행을 견디면서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덛붙인다. 이에 피터는 인생은 장애물을 없애 가는 거라는 것이라는 친부 고든의 말을 인용하며 되받아친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삶을 어떻게 진행시켜 나갈 것인지에 대한 서로의 의견 차이이기도 하면서 당장 눈앞에 있는 고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필은 고통을 견뎌내야 할 것으로 파악하고 사회의 편견이나 차별에 저항하는 대신 그 일부가 되어 그저 흘러가게 두겠다는 입장인 셈이다. 반면 피터는 장애물(고통)이 있다면 그것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일갈하는 셈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어지는 대화에서 필과 피터가 장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피터에게 확실히 장애물이 있다며 입을 떼는 필이 말하는 것은 결국 로즈야말로 피터에게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브롱코 헨리가 자신에게 그랬듯 자신이 피터에게 그렇게 하기 위해선 둘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로즈가 가장 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피터가 말하는 장애물은 필이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


<파워 오브 도그>의 극 초반엔 의미심장한 내레이션이 나온다. “만약 엄마를 돕지 않는다면, 나는 사내도 아니지.” 피터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그 짧은 내레이션은 이후 이어지게 되는 필과의 대화에서 그가 장애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피터가 생각하는 장애물은 곧 필을 의미하는 셈이다. 사내가 되기 위해선 엄마를 도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게 막는 것이 필이기 때문이다. 사내(man)가 되지 못한다면 그 삶은 실패한 삶이기에, 피터는 제대로 살기 위해선 아버지의 말에 따라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다.


머지않아 피터는 그 생각을 현실로 옮긴다. 가죽이 없어 더 이상 밧줄을 만들지 못하는 필에게 피터는 새 가죽을 가져다주어 다시 밧줄을 만들게 한다. 그 가죽은 탄저균에 감염된 소의 사체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다음날이 되자 탄저균에 감염된 필은 시름시름 앓다가 머지않아 사망한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서 항상 약자로서 묘사되는 로즈는 항상 “아픈 사람”으로 묘사됐었다. 그건 필이 그녀에게 끊임없는 심리적 압박을 준 끝에 알코올 중독에 빠져버렸기 때문이고, 심리적으로 고립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아프거나 병든 것은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스스로를 강자로 여겼던 필은 약자의 자리로 끌어내려진 후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약자로 여겼던 피터에 의해서.


그런데 필을 죽인 것은 가죽에 있던 탄저균 때문이기도 하지만 항상 맨손으로 작업할 것을 고집하던 필의 그 강인한 손 때문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강인한 손에 상처를 낸 유약한 토끼 한 마리 때문이기도 하다. 필은 “예전에 했던 방식대로” 나무 사이에 숨은 토끼를 잡으려다가 손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만약 토끼를 잡지 않았다면 필은 죽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유약한 토끼는 결국 개의 몸에 상처를 낸 뒤 병균이 침투할 공간을 만들어 끝내 죽게 한다. 피터는 (스스로 강자의 위치에 있다고 믿는) 필에게 탄저균을 감염시켜 약자의 위치로 끌어내린 후 그를 살해한다. 자동차를 타지 않는 사람을 자동차에 태우고, 옷을 벗지 않는 사람의 옷을 벗겨낸 후, 씻지 않는 사람의 몸을 씻겨내어 관에 들어가게 만드는 사람은 결국 피터다.


필은 피터가 자신과 같은 동성애자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밧줄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고 함께 여정을 떠나자고 제안했다. (추측컨대 과거 브롱코 헨리도 그랬을 것이다.) 필은 먼 옛날 브롱코 헨리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대로 따라 하면 피터도 곧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피터는 필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길을 따를 수 없고, 따르지도 않는다. 피터 아버지가 피터에게 한 이야기를 듣고 필은 “독해? 네가?”라고 맞받아치지만 필은 사실 피터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해 완전히 오판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 피터가 만든 종이꽃을 보고선 “어떤 꼬마 아가씨가 이걸 만들었을까?”라고 말하던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애초에 피터는 필의 은밀한 바람과는 다르게 동성애자이지조차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관객으로 하여금 필에겐 대화 속 암시되는 단서들로 과거를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상당 부분 있지만 피터는 그렇지 않다. 게다가 피터는 필을 제외하면 극 중 어떤 남성들과도 엮이지 않는다. (새아버지인 조지와는 마주 보는 장면조차 없고, 소설과 다르게 실제 아버지와의 관계도 상당 부분 생략되었다.) 심지어 피터가 자신과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을 '짖어대는 개' 이야기에서조차도 필과 피터는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필은 브롱코 헨리에게 교육받은 후에야 그 개를 볼 수 있었지만 피터는 그러지 않고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여성성을 가진 남자라고 해서 남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종이꽃을 만들고 토끼를 쓰다듬는다고 해서 게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 토끼를 해부까지 하고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또한 장갑을 낀다는 것이 맨손으로 일하는 자보다 약하다는 증거인 것 역시 아니다. 밧줄을 끊는 것이 밧줄을 만드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피터는 필보다 결코 약하지 않다. <파워 오브 도그>는 강과 약, 남성성과 여성성,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 외면과 내면, 마초적 서부극과 그 판타지 자체를 뒤집으며 진정으로 강한 자가 누구인지 되묻는 외유내강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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