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2006), 타셈 싱
적어도 <더 폴>을 보는 동안 당신은 흡사 색채의 마술을 부리는 듯한 황홀경에 젖어들게 될 것이다. 인도 감독 타셈 싱이 무려 28년 동안 전 세계 24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완성한 이 영화는 타지마할과 같은 명소는 물론, 찬드 바오리에서 조드 푸르까지, 붉은색과 파란색과 흰색과 같은 원색들을 차례로 대비해 나가며 화려하게 뻗어나간다. (다 보고 나면 당신은 틀림없이 인도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더 폴>이 이러한 스타일을 구현하는 이유는 단순히 스크린을 팔레트 삼아 색감 놀이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건 무엇보다도 이야기가 중요한 영화이니까.
1920년대 할리우드, 스턴트맨 로이(리 페이스)는 영화를 촬영하다 추락하는 사고를 겪은 후 병원에 입원한다. 우연한 계기로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이던 소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언타루)를 만나게 된 로이는 허구로 이야기를 만들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은 알렉산드리아에게 마약성 약물인 모르핀을 구해 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더 폴>은 추락하는 두 가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베토벤 7번 교향곡과 함께 물에 빠진 말이 자맥질하고 영화 스태프들이 소리치는 가운데 누군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밧줄이 던져지는 긴박한 광경이 흑백의 슬로 모션으로 펼쳐진다. 마치 영화적 마법을 부리는 듯한 이 오프닝 신은, 아닌 게 아니라, 관객의 집중을 그야말로 단번에 사로잡는다. 이제 영문도 모르는 채 삽시간에 이 아수라장으로 빨려 들어간 관객은 곧 얼떨떨한 마음으로 영화 속으로 흠뻑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게 대관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영화인 것일까.
곧 지나지 않아 관객은 그게 주인공 로이의 사고 장면이었음을 알게 된다. 스턴트맨인 로이가 여배우의 환심을 사려다 말에 잘못 올라타는 바람에 입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머지않아 알렉산드리아의 시선을 빌려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주인공의 추락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만약 로이가 추락하지 않았다면 병원에 올 이유도 없고, 나아가 알렉산드리아를 만나게 된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로이는 결국 추락했고 그렇게 알렉산드리아를 만났다. 영화 촬영장에서 병원까지, 허구의 이야기에서 현실까지 ‘추락’을 구현하는 이 영화의 눈부신 스타일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추락을 뜻하는 이 영화의 원제(‘The Fall’)가 의미하는 것 역시 그렇다.)
여기엔 또 하나의 추락이 있다. 그건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추락이다. 애초에 알렉산드리아가 병원에 오게 된 것은 로이와 마찬가지로 추락했기 때문이었다. 로이가 영화 촬영 중에 사고를 겪은 것처럼 알렉산드리아는 오렌지 나무에서 떨어졌다. 두 사건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그 성질이 같다. 더구나 두 인물은 각각 한쪽 다리와 팔이 온전히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어쩌면 두 사람은 애초부터 마주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두 주인공이 서로를 만날 수 있었던 까닭은 간호사에게 전하려던 알렉산드리아의 편지가 바람에 날려 2층에서 1층으로 잘못 ‘추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듯, 두 사람은 같은 듯 확연하게 다르다. 로이는 우연히 만나게 된 알렉산드리아에게 그 이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이야기 속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사막에서 길을 잃은 상태다. 그때 부하 한 명이 투구 가득 물을 가져온다. 결코 적은 양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일행 전체가 마실 수 있는 양도 아니다. 이때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에게 묻는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에게 전하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는 사실상 삶에 대한 태도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삶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과연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 알렉산더 대왕은 그 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때 알렉산드리아가 말한다. “그 물을 조금씩 모두에게 나누어 줄 거예요.” 말하자면 끊임없이 추락해 떨어지고 만 구렁텅이 속에서도 물을 조금씩 나누어 사용하며 희망의 고리를 찾는 것이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다. 하지만 로이의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의 그것과 자못 다르다. 로이의 입에서 직접 발화된 이 이야기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물을 풍족하게 쓰지 못할 바에 차라리 모두 버려버린다. (바구니에 든 물을 모두 버리는 장면은 로이의 입에서 발화되는 극 후반부에 다시 한번 변주되어 나타난다. 말하자면 로이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할 조그마한 희망이 있을 바에야 아예 희망 자체를 버려버리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선명하게 상반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의견은 로이의 이야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추락하는 것은 인물뿐만이 아니다. 이야기 역시 수직의 방향으로 추락한다. 화자의 입에서 청자의 귀로, 이야기는 비가역적인 물의 성질을 지닌 채 위에서 아래로 하강한다. 만약 이야기가 끊임없이 하강한다면, 결국 듣는 입장에서의 청자는 화자가 하는 말을 꼼짝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더 폴>에서 이야기는 늘 한 방향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추락하는 것들은 모두 사고로 이어진다는 점을 간과하긴 힘들다. 영화 밖에서 벌어지는 두 번의 추락을 포함, 두 주인공이 겪는 모든 추락은 신체적인 손상과 결부되어 있다. 애초에 로이가 척추에 손상을 입은 것은 스턴트 과정 중 말로 잘못 추락했기 때문이고, 알렉산드리아가 팔에 깁스를 한 것은 오렌지나무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로이의 이야기 속 인물들의 죽음 역시 추락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 역시 이 영화 속 추락이 곧 실패나 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을 드러낸다. 알렉산드리아의 편지는 바람에 날려 엉뚱한 곳으로 실려가고, 인부가 자른 나뭇가지는 아래에 있던 다른 인부의 손에 닿지 못한다. 그리고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는 것은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때 로이의 이야기가 알렉산드리아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는 까닭은 청자의 입장에서 내내 듣기만 하던 그녀가 역으로 이야기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극 중 로이의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에 의해서 수시로 수정되고 고쳐 서술된다. 로이의 이야기 중 사제가 분에 겨워 어린아이를 막대기로 폭행하려 들자 알렉산드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사제는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러자 로이는 즉석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 사제의 행동을 근처의 독사를 쫓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급히 수정한다. 이후에도 로이의 이야기는 수차례 고쳐 쓰여진다.
알렉산드리아는 공주의 눈동자 색깔, 취미, 좋아하는 색을 차례로 호명하곤 아예 그 얼굴마저 바꾸어놓는다. 로이의 이야기에서 공주는 모습은 자신의 여자친구를 투영하지만 알렉산드리아가 상상하는 공주는 간호사의 얼굴을 꼭 닮았다. 이야기 속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습은 알렉산드리아의 생각을 거쳐 말 그대로의 인디언(인도인)으로 자연스럽게 변형된다. 이 영화 속 이야기는 청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형태가 무시로 바뀐다는 점에서 항상 잘못 전달(추락)되는 셈이다.
또한 <더 폴>의 이야기가 화자의 의도에 따라 수시로 방향이 바뀐다는 사실 역시 허투루 보기 어렵다.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에게 원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이야기를 끊고선 자신의 발가락을 만져보라는 요청을 한다. 물론 여기엔 내적인 논리가 있다. 척추를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된 로이가 자신의 다리 감각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행동까지 모두 보고 나면 이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어쩌면 이건 화자의 의도에 따라 방향이 좌우되는 이야기의 가변성에 대한 장면이 아닐까. 알렉산드리아는 발가락을 만져보라는 로이의 요청에 따라 새끼발가락에 손을 올려놓는다. 어느 발가락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지 내가 알아맞혀 보겠다. 그러나 로이가 좀처럼 어느 발에 손가락이 올려져 있는지 짚어내지 못하자 알렉산드리아는 곧바로 새끼발가락에 올려져 있던 손을 엄지발가락으로 옮기며 이야기를 수정한다. 화자의 이야기를 믿지 못한 청자는 거듭해서 이야기의 진위여부를 파악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시도는 곧 완강하게 부정하는 화자의 태도에 의해 금세 수그러진다. 이미 발화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청자가 안고 있지만, 그런 청자의 처지를 미리 염두에 두고 이야기 자체를 수정할 수 있는 것은 화자이다.
극의 클라이맥스에 가까워지면, 청자는 아예 화자의 이야기 속으로 틈입해 이야기를 되살려내기에 이른다. 극 중 주인공 무법자 일행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 등장하는 꼬마 무법자는 애초에 로이의 이야기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꼬마 무법자는 기어코 밧줄을 풀고 손에 총을 쥐어줌으로써 이야기를 다시 호흡하게 만든다.
이때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은 원 화자인 로이가 아니라 오히려 청자의 위치에 있던 알렉산드리아에 가깝다. 가짜 모르핀을 먹고 잠에 빠진 로이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갈 때 즈음 알렉산드리아가 꼬마 무법자의 모습으로 이야기 속에 직접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 순간 알렉산드리아는 이야기의 새로운 화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의 말미에 가서 알렉산드리아가 “그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라고 강변한다고 해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 말 그대로 이 영화의 이야기는 화자와 청자의 위치를 수시로 뒤바뀌며 기적 같은 해피엔딩을 만들어낸다.
알렉산드리아가 다시 쓴 그 이야기는 기존 로이의 이야기의 결말을 실패로 돌리면서 동시에 끝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새롭게 쓰인(혹은 앞으로 쓰일) 그 이야기는 이제 화자의 위치에 오른 알렉산드리아의 가치관을 따라 파괴 대신 재생을 희구한다. (로이의 이야기가 향하는 목적은 사실상 자살이라는 자기 파괴적 욕구였다.)
그러니까 마침내 이야기는 화자만의 것이 아니라 청자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수정할 수 있는 타륜은 화자가 쥐고 있지만, 그 위치가 이야기 중 무시로 바뀐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이야기는 결국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네 이야기가 내 이야기고 내 이야기가 곧 네 이야기이기도 한 무한굴레 속에서 화자와 청자는 신비롭게 공명한다.
공명하는 것은 비단 이야기 속의 화자와 청자뿐만이 아니다. <더 폴>은 개봉 당시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이렇다 할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외면당한 걸작이었다. 그러다 데이비드 핀처, 스파이크 존즈 등의 노력으로 4K 리마스터링 된 후 새롭게 생명을 얻게 되었다. 말하자면 <더 폴>은 관객이 다시 되살려낸 영화인 셈이다. 화자와 청자, 관객과 창작자의 관계를 깊숙이 탐구하는 이 영화의 이야기가 바깥으로부터 다시 영향을 받아 소생되는 광경은 영화의 안과 밖에서 서로 신비롭게 맞닿아 있다. 어쩌면 에필로그에서의 알렉산드리아의 말은 감독이 관객에게 하고 싶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