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 심리학"-나를 찾는 여정 2번째 3
우리는 지난 여정을 통해 내면의 지도를 한층 더 입체적으로 그려내었다. 오늘날 MBTI의 뿌리가 된 융의 '심리 유형론'을 살펴보며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각기 다른 색깔임을 확인했고, 내향과 외향, 그리고 사고·감정·감각·직관이라는 나침반이 우열의 문제가 아닌 에너지의 방향성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타인에 대한 격렬한 불쾌감인 '발작 버튼'이 실은 내가 소외시킨 '열등 기능'의 그림자라는 통찰은, 상대를 향한 비난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겸손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나아가 성별의 경계를 넘어 내면의 이성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대면하며, 사회적 가면인 페르조나 뒤에 억눌려 있던 미숙한 에너지들을 의식 위로 끌어올리는 법을 배웠다. 잃어버린 반쪽을 밖에서 찾는 대신 내면에서 발견하여 통합하는 '대극의 합일'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주체로 서게 했으며, 이는 흩어진 인격의 조각들을 모아 커다란 '원(Circle)'을 완성해가는 숭고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제 우리는 융 분석심리학의 가장 깊은 심장부이자, 그동안 찾아낸 파편들을 하나의 온전한 원(만다라)으로 엮어내는 최종 단계로 진입한다. 앞선 여정이 나를 구성하는 조각들을 세밀히 살피는 과정이었다면, 이번 항해는 무의식이 건네는 정직한 상징 언어인 꿈을 나침반 삼아 자아가 놓치고 있는 삶의 진정한 방향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우울이나 신경증 같은 고통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병이 아니라, "이제는 본래의 나로 돌아와야 한다"고 외치는 무의식의 긴급하고도 자애로운 메시지로 재해석하게 된다. 결국 의식의 주인인 자아(Ego)를 넘어 내면의 신성이자 인격의 설계도인 자기(Self)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가면에서 벗어나 오직 나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피어나는 개성화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인생의 오후라는 전환점에서 만나는 이 숭고한 통합의 여정은, 마침내 '온전한 나'라는 만다라를 완성하는 거룩한 귀환의 길이 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우리를 온전함으로 이끄는 '거대한 치유자'가 이미 존재한다. 무의식은 감추는 곳이 아니라 가르쳐주는 곳이며, 꿈은 그 지혜가 담긴 나침반이다. 자아(Ego)라는 작은 돛단배가 자기(Self)라는 거대한 바다의 흐름에 몸을 맡길 때, 고통은 의미를 얻고 인격은 우주적 질서와 조우한다. 융의 심리학은 믿음의 학문이 아니라, 체험과 성찰을 통해 '자기'가 되어가는 사실의 학문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꿈을 보는 특징적 태도는 “꿈은 감추지 않는다. 가르쳐준다.”는 데 있다. 이것은 무의식을 ‘창조의 샘’이라는 관점으로 보았기에 가능한 자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꿈의 해석’이란 무의식이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무엇을 가르쳐주고자 하는지 알아보는 작업이다.P129. -5
프로이트가 꿈을 억압된 욕망을 가리는 가면으로 보았다면, 융은 꿈을 꾸밈없는 '자연의 언어'로 보았다. 꿈은 우리를 속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징을 통해 자아가 놓치고 있는 진실을 보여주고, 영혼의 불균형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무의식의 정직한 노력이다. 그러므로 꿈 해석은 내 안의 가장 지혜로운 스승과 나누는 대화이다.
꿈에 나타난 모든 것, 동물들, 식물들, 물과 산과 바위와 돌, 인물, 악한 괴물, 신령들은 모두 그의 마음속의 심리적 콤플렉스들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본다. 상징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자유연상보다 확충의 방법을 쓴다. 자유연상으로는 본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비약되기 때문에 본래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연상을 집중적으로 하는 확충방법을 쓰는 것이다. p130. 6
융의 '확충법'은 꿈의 이미지를 개인적 기억의 울타리에 가두지 않고, 인류 보편의 신화와 민담, 종교적 상징으로 확장하여 그 의미를 풍성하게 꽃피우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한 개인의 꿈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공유해온 고대의 지혜와 연결되며, 그 상징은 단순한 도식이 아닌 생생한 생명력을 얻는다.
꿈에는 분명 예시적인 기능이 있다. 죽음, 질병과 같은 객관적인 사건과 꿈이라는 심적 체험 사이의 의미상의 일치가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융은 이를 비인과적 원리(Acausal Principal)에 의한 동시성 현상이라 하여 정신현상에는 원인-결과의 원리에 따라 진행되는 현상뿐 아니라 비인과적 동시성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무의식은 절대지(Absolute Knowledge)를 지니고 있어 시공간을 상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p138. 1
삶에는 인과론으로 설명하지 못할 신비가 있다. 내면의 꿈과 외부의 사건이 '의미'라는 끈으로 엮이는 '동시성(Synchronicity)'이다. 무의식 심연에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지혜가 있으며, 우리가 우연이라 믿는 것들도 실은 영혼의 지도 위에서 필연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우주적 사건이다.
융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체험 내용에서 신화적 요소를 발견했고 그것은 그에게 원형학설을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는 조현병환자를 위대한 신비가들과 꼭 같은 체험을 하면서도 그 의미를 소화시키지 못한 ‘실패한 신비가’라고 보았다. 조현병 환자는 건강한 사람이 꿈에서 겪는 원형적 체험과 꼭 같은 체험을 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는 건강한 사람이 수면 중에 경험하는 것을 대낮에 경험한다는 차이가 있다. p141. 3
융은 정신병을 단순한 뇌의 고장이나 무의미한 증상으로 보지 않고, 무의식의 거대한 신화적 원형이 의식을 압도한 상태로 보았다. 환자들은 단지 그 거대한 파도를 감당할 자아의 힘이 부족했을 뿐이다. 이러한 통찰은 고통받는 이들을 비정상이 아닌, 무의식의 바다에 휩쓸린 고독하고 숭고한 항해자로 바라보게 한다.
융은 신경증적 장애로 인한 고통은 의미 있는 고통인데 앓는 사람은 그 의미를 아직 모르고 있는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융은 환자가 겪은 어린 시절의 경험도 중요시했지만 이에 못지 않게 병고가 가지고 있는 목적의미에 주목하였다. 우울한 감정이나 심인성 신체적 고통 뒤에는 밖으로 향한 시선을 안으로, 무의식으로 돌리려는 무의식의 목적이 있다. 신경증적 장애는 대개 자기소외의 증후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자아가 전체정신에서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무의식은 고통스런 증후를 통해 경계 신호를 울리고 전체정신을 회복하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명성을 떨치고 성공의 길을 달려가고 있던 사람에게 우울증이나 신체의 고장은 자신의 내면을 보살피는 기회를 제공한다. 모든 신경증적 고통 뒤에는 이러한 무의식의 숨은 뜻이 있는 것이다. p142~143. 8
고통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자아가 전체 정신의 궤도에서 이탈했을 때 울리는 '치유를 향한 사이렌'이다. 특히 외부의 성공만을 쫓던 이에게 찾아오는 우울은 내면으로 돌아오라는 무의식의 처절한 초대이다. 고통의 '원인'이 아닌 '목적'을 묻는 순간, 병은 인격 성장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된다.
융학파의 분석에는 여러 가지 점에서 프로이트로부터 시작한 정신분석학파와 다른 점이 있다. 물론 둘 다 앓는 사람을 돕는 심층치료법이고 통찰요법임에는 틀림없다. 그 다른 점의 첫째는 융학파의 분석대상은 ‘병’이나 ‘환자’가 아니라는 것, 즉 한 개체의 전 존재, ‘그 사람’이다. 분석심리학 사전에는 ‘환자’가 없다고 할까. 실제로 1960년대에 내가 스위스에서 분석심리학 수련을 받을 때 융 연구소 소장이자 나의 첫 교육분석가이던 프란츠 리클린 박사는 연구원들에게 ‘환자’라는 말을 쓰지 말 것을 요구했다, ‘환자’라는 말 대신에 ‘피분석자’라고 말하도록 한 것이다. 분석대상을 ‘환자’라고 보면 정신병리의 범주 안에서 그 사람을 보게 되고 그 개인의 전체 인격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p145. 1
'환자'라는 호칭은 대상을 고장 난 기계로 보게 하는 오류를 낳는다. 융은 고통받는 이의 증상을 넘어 그의 전체 인격과 그 안에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보려 했다. 분석은 단순히 질병을 고치는 행위가 아니라, 한 인간이 본연의 자기(Self)가 되어가는 과정을 돕는 거룩한 동행이다.
둘째, 융학파의 ‘분석’은 ‘파헤치는 것’ 아니라 ‘보태는 것’이다. ... 셋째, 융학파의 ‘분석’에서는 체계적인 치료기법, 임상진단, 적응증, 금기, 예후 등 의학의 전통적인 접근방식을 버리고 ... 넷째, 분석가는 피분석자와 대등한 개인이며 ... 다섯째, 융학파 ‘분석’에서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것은 분석가의 자세이다. ... 분석의 목적은 개인이 그 개인의 전체가 되도록 돕는 데 있기 때문이다. p146~147. 1
분석은 과거의 상처를 도려내는 외과적 수술이 아니라, 버려진 인격의 조각들을 모으고 보태는 연금술적 '합성'의 과정이다. 분석가는 권위자가 아닌 '치유된 상처 입은 자'로서 피분석자와 대등하게 만난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과 영혼이 실존적으로 마주하는 분석가의 진실한 자세이다.
융은 꿈이 무의식에 존재하는 전체정신의 핵, 즉 ‘자기’의 의도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꿈은 매일매일 ‘자기’가 꿈꾸는 사람의 ‘자아’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자기’란 의식의 중심인 ‘자아’와 달리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한 그 사람의 전체정신인 동시에 그사람이 그 자신의 전체가 되게 하는 숨은 능력이다. 이것은 모든 개인에게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진 선험적 조건이다. 분석의 목표는 그 사람의 전체정신, 다른 말로 ‘본성’을 찾아주는 데 있다. ‘자기’ 혹은 ‘자기원형’의 메시지는 독특한 상징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해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랜, 여러 해에 걸친 수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p150. 2자아가 내가 인식하는 의식의 주체라면, '자기'는 내 정신의 북극성이자 삶의 설계도이다. 꿈은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는 정교한 지도이다. 개성화는 자아가 자신의 좁은 고집을 내려놓고 더 거대한 자기가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여, 본래 씨앗의 상태로 존재했던 내 안의 신성을 온전히 실현하는 과정이다.
대화라고 해서 늘 조용히 차근차근 이성적으로 말을 주고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도 나오고 흥분도 하고 언성도 높아질 수 있다. 그것을 너무 억제하는 것도 좋지 않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상대방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대화의 목적을 사사로운 자아의 이익에 두면 창조적인 성과를 얻을 수 없다. 가식과 체면이 아닌, 사사로운 이익도 잔꾀도 아닌 나의 전체 마음을 들어서 상대방의 전체의 마음과 대면할 때 그 대화의 결과는 두 사람 모두에게 큰 치료적 의미를 가져다 줄 것이다. 중궁이 공자에게 인(仁에) 관해서 물었을 때 공자가 말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아라.” p166. 6
진정한 대화는 말의 기교가 아니라 전체 마음과 전체 마음이 부딪히는 실존적 사건이다. 가면(페르조나)과 욕심을 내려놓고 인간 대 인간으로 투명하게 마주할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난다. 타자를 나와 동등한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인(仁)의 정신이야말로 분석의 가장 깊은 윤리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본래 인간이 전체로서 살게 하는 창조적 원동력이 있다”고-. ... 융은 무의식에 갖추어진 이러한 원초적 조건을 자기원형이라 불렀고 ... 전체정신의 중심핵을 의식의 중심인 ‘나’, 즉 자아와 달리 자기라 불렀다. ... ‘자기’ 혹은 ‘자기원형’의 메시지는 독특한 상징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해독하기가 쉽지 않다. ... 객체정신으로서의 ‘자기’가 자신과 모든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는 융의 심리학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p180~183. 1
우리 안에는 자아의 지각을 뛰어넘는 거대한 창조적 지혜가 이미 내장되어 있다. '자기'는 자아의 통제를 받지 않는 거룩한 타자이자, 우리를 온전함으로 이끄는 내면의 치유자이다. 이 내면의 핵을 인정하고 그 메시지를 경청하는 것이 융 심리학의 본질이자 정점이다.
융이 발견한 것은 형이상학적인 신이 아니다. 사람들이 신이라고 상상하고 있는 것의 살아 있는 상징이었다. 이러한 발견은 단순한 지적인 산물도 믿음의 결과도 아닌 체험한 바를 생각하며 성찰한 결과이다. 융은 항상 자기의 입장은 현상학적 입장이고 자기의 심리학은 사실의 학문이며 그 점에서 자연과학의 입장과 같다고 보았다. p185. 10
'자기'는 막연한 종교적 신념이나 형이상학적 추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 안에서 실제로 기능하는 역동적인 '심리적 사실'이다. 융은 맹목적인 믿음을 거부하고, 직접적인 체험과 성찰을 통해 증명된 진실만을 추구하였다. 내면의 신성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 발견하고 입증해내야 할 실체이다.
이부영 교수가 독일 취리히의 융 연구소에서 수련하던 시절 경험했던 치료공동체의 풍경은 융 심리학이 지향하는 인간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곳에는 의사와 환자의 엄격한 위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나무숲과 꽃밭이 어우러진 공원 같은 공간에서 그들은 함께 식사하고 정원을 가꾸었으며, 누구의 꿈인지 밝히지 않은 채 둘러앉아 상징을 논했다. 의사는 군림하는 치료자가 아니었고, 환자는 수동적인 치료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선 동등한 동료 항해자들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강조한 "나와 너(Ich und Du )"의 관계와 일맥상통한다. 가운을 입지 않은 분석가가 환의를 입지 않은 피분석자를 사람 대 사람으로, 살아있는 인격 그 자체로 마주하는 것이다. 분석가 또한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아본 경험이 있는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서, 상대의 전체 인격을 존중하며 실존적으로 부딪힌다. 이러한 '온 존재를 기울인 진정한 관계'야말로 융 심리학이 말하는 치유의 본질이다.
지금 50대 중반의 내가 나를 찾는다는 것은 사회가 씌워준 가면(페르조나)을 벗어던지고, 내가 버렸던 어둠(그림자)을 끌어안으며, 내면의 이성(아니마·아니무스)과 화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아(Ego)라는 작은 돛단배의 키를 내 안의 거대한 치유자인 자기(Self)에게 내어주는 겸허한 결단이다.
50대, 인생의 오후에 시작한 이 여정은 이제 단순한 자기 인식을 넘어 타인과 세상을 '너'로 받아들이는 겸손과 연민으로 확장된다. 내 안의 그림자를 본 사람은 타인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고, 내 안의 신성을 발견한 사람은 타인의 존엄을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융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메시지는 명료하다.
"당신은 이미 온전하며, 당신 안의 치유자를 믿고 그저 당신 자신이 되어라."
끝으로,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 심리학 책 몇 권을 읽고 계속 입 안을 맴돌았던 말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쉽게 하는 널 내가 미워해서 미안해! "
그림자2
김문식
앞서 달아나려고 발버둥 치는 널
미안하지만 멀리 놓아줄 수 없다
연해 지칠 너를 걱정도 하거니와
같이 나란히 걸으며 대화라도 나누고 싶다
어느새 내 뒤에서 신음하는 너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은 등을 내어 준다
전혀 무겁지 않은 발걸음
네 사랑의 배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