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 차를 사러..."
|아기들을 돌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1999년 이곳 뉴질랜드의 가을쯤 되는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일이 나에게 벌어진 날이...
가슴 아프시게 우시면서 어린 나를 두고, 크고 무거운 화장품가방을 하나는 짊어 메시고, 또 하나는 드시고는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모레 아줌마 일을 가셔야 하셨었던 엄마의 슬픈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절대 어린아이들을 집에 두고 일을 하지는 않게 해달라고 늘 기도했었다.
내 나이 고작 세 살이었던 어린 시절, 집에 혼자 큰 바둑이의 돌봄 아래 남겨져있었던, 지금 생각해 보면 위험 천만인 상황에 처해졌었기에, 나의 아이들만큼은 절대로 같은 일을 겪게 할 수는 없어서, 몇 번이고 재차 부탁하고 또 굳게 약속을 했었던 그였었다...
그런데 나의 어린아이들이 고작 1살, 3살 그리고 5살일 때에 나는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것도 한국도 아닌 아무도 없는 뉴질랜드에서, 영어도 이곳 생활도 서툰 30살의 어린 세 아이의 엄마가...
|버려진 강아지 같던 아기들|
오클랜드 시내에 위치해 있었던 초밥가게를 인수한 그는 30살인 부지런한 나를 염두에 두고 그 가게를 운영할 예정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과 또 가게를 도와주러 한국에서 온 언니의 세 아이, 아직 초등학생인 어린 세명의 조카들만이 집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 한 명의 어른이 (내가 아닌…)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조건으로 내가 결국은 그 어린 아기들을 집에다 두고, 새벽 6시부터 밤 7~8시까지 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들만이 집에 남겨지는 날들이 많아졌었고, 아기들과 아직 어렸던 조카들만이 있는 집에서 나의 한 살 베기와 세 살 베기는 강아지처럼 서로 물고 뜯고 싸워서, 밤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한 살 베기는 머리통에 잇자국을 따라 깊이 물린 상처에 피가 맺혀 있었고, 세 살 아이는 그걸 보고 막내를 더 아끼는 다섯 살 딸이 말리면서 때렸는지 멍이 들어 있었다. 가슴이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세 살 아기를 식당에 데리고 나간 이유|
결코 살고 싶지 않은 순간 중의 하나였다. 내 아이들이 그런 상황에 놓일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아예 결혼조차도 안 하고 홀로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욕심내지도 않았었다. 그저 내 아이들을 내가 키우기를 원하고 바랬었다. 엄마 된 자가 그런 소망을 가지는 것이 당치도 않은 것일까...
결국 그래서 나는 세 살 아들을 데리고 식당일을 하러 갈 때가 많았다. 새벽부터 깨워서 데리고 나가야 했었다.
집에서 입는 옷 위에 좋아하는 조끼와 청모자를 쓴 얼굴이 백옥처럼 하얗고 많이 마른 나의 둘째는 성격이 여리고 예민하여서 어릴 때부터 엄마 껌딱지였었고, 다들 힘들었겠지만, 특히나 원이는 가장 엄마와 떨어져서 어린 어린이 4명이 서로 편을 지어 작은 아기 두 명을 따로 감싸는 아이들만의 밀림속 같은 곳에 남겨졌었어야 했었던 것이 더 힘들었었을 것이다.
|초밥집 아침 일상|
초밥집의 일상은 다양하고 바쁜 아침 세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아주 이른 새벽에 식당용 대형 밥통에 밥을 안치고, 다 된 밥을 큰 스테인리스 쟁반에 나누어 퍼 담은 다음 한 김 식혀지면, 미리 만들어 놓은 촛물 (식초, 정종, 다시마, 설탕, 식초 그리고 소금을 넣고 미리 만들어 놓은 초밥용 양념 물)을 조금씩 넣으면서 섞어준 후에, 밥이 잘 섞이고 식으면, 초밥의 종류대로 만들기까지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그래서 아침에는 초밥 속 재료, 데리야키 치킨, 연어 손질하기, 야채 손질, 불고기 만들기, 그리고 초밥 외에 중국 요리도 손님들이 퍼 담아 갈 수 있는 식으로 8가지의 종류를 준비하여야 해서, 연변 식당 이모님께서 주로 하셨었지만, 나는 초밥 만드는 것이 나의 바쁜 아침 3-4시간을 꽉 채우는 일과이었다.
|혼자 세 시간을 보낸 세 살 베기|
그날도 뉴질랜드 라디오 에프앰 방송을 들으며,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자주 들었는지, 자기 혼자만 알 수 있는 소리로 영어노래를 따라 부르던 세 살 원이는 불평불만 없이 식당 안에서 놀고 있었다.
엄마가 바쁘게 초밥을 만들고 식당을 열 준비를 하는 동안에, 투달러 스토어 ($2 store)라고 우리나라로 치면 다이소 같은 곳에서 사준 작은 자동차 두 개를 가지고 식당의 선반을 달리며, 부릉부릉 소리도 내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팝송을 "삐격갱이 삐걱갱이"라 하면서 노래도 따라 부르며, 혼자서 그 무료하고 긴 서너 시간을 가엾게 보내던 세 살 베기 원이의 모습이 25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초밥 밥을 스테인리스 쟁반에 퍼서 식히려고 해 놓고 나왔는데, 갑자기 원이의 노랫소리도 자동차 놀이 부릉부릉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원아 원아" 하고 부르며, 식당 앞과 주위의 상점들도 찾아보러 갔지만 아무 곳에도 아기는 없었다.
|원이 좀 찾아주세요 그랜트 씨|
그때 마침 매일 단골로 우리 가게에 초밥을 사러 오시는, 키가 큰 뉴질랜드 신사, 그랜트 씨가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울면서, 서툰 영어로 아들이, 세 살밖에 안 먹은 아들이 갑자기 없어졌다고 했다.
그는 당장 경찰에 연락해 볼 테고, 어린 아기라 멀리 가지 않았을 테고, 또한 뉴질랜드는 안전한 곳이니(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안전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자신의 비서들에게도 아이를 찾는 것을 돕게 해 주었다. 그리고 다른 단골손님들도 밖으로 나가서 아기를 찾아 수소문해 주셨다.
나는 가게는 장사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고, 주방 이모님께 맡겨두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미친 사람처럼 꾹 참던 울음이 밖으로까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네 시간의 지옥|
"내가 절대, 아기들 어릴 때 일하는 엄마는 안되게 해달라고 했잖아, 게다가 여기 외국땅에서 이게 무슨 일이야. 애 없어져서 못 찾으면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그로부터도 네 시간은 지옥 같은 암흑, 말로 못할 불안감, 원망감, 한탄감 그리고 슬픔이라고 단순하게 표현하기엔 말도 안 되는 심정으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끝에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그랜트 씨가 급히 달려왔다.
나의 식당이 있던 곳은 오클랜드 시내, 현재는 Commercial Bay (커머셜 베이 쇼핑센터) shopping mall이지만, 오래전에는 오클랜드 다운타운 몰이었던 곳에서 큰길을 건너서 도보로 10 분도 채 안 되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가끔 바쁜 시간이 끝나고 원이가 너무 심심해하면은 딱해서, 종종 데리고 가서 그 쇼핑몰 2층의 투달러 샵에서 그날 아침에도 가지고 놀았던 작은 자동차를 사주고는 했었다.
|심심하다..|
초밥 만드느라고 바쁜 엄마와 놀 수도 없고, 가지고 놀던 장난감 차외에 또 다른 자동차가 사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복 한 벌 위에 조끼 그리고 청모자를 쓴 세 살 베기, 원이는 혼자서 그 작고 마른 다리로 자박자박 혼자 걸어가서, 그 큰 사거리 교통량도 많고 위험한 4차선 교차로를 건너서, 그 다운타운 쇼핑몰까지 혼자 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세 살 원이에게는 예상도 못했던 큰 장벽이 있었다. 늘 엄마 손을 잡고 타고 올라갈 수 있었던, 에스칼레이터였다. 아무리 봐도 너무 무서워서, 그곳을 계속 10분도 넘게 빙빙 돌고 있으니, 주변의 외국인 어른들이 그 쇼핑몰의 안전 요원에게, 어린아이가 보호자도 없이 혼자 다닌다고 신고를 해준 것이다.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아기인가?|
안전 요원을 보자 원이는 어디 잡혀 가는지 알고 놀라고 무서워서는 울음을 터뜨렸고 전혀 의사소통이 안되자, 그들은 얼굴이 무척 하얗고 갸름한 아기 원이를 보더니, 일본인이 하는 초밥집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일본말로 하자 다시 원이는 더 크게 울어 버렸고, 이번에는 중국 음식점 사장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었는데, 계속 울어버리는 원이, 그 안전 요원들은 마지막으로 카페를 운영하시는 한국 사장님께로 갔는데, 한국 사장님께서 한국말로 원이에게 말을 걸자 바로 그 작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 사장님의 손을 바로 꼭 잡았다고 한다.
아마도 어린 원이는 큰 안심이 되었던 것 같다. 그 사장님께서는 원이 얼굴보다 더 큰 사탕을 일단 아이에게 쥐어 주어서 울음을 그치게 해 주셨고, 경찰에 신고를 하였는데, 마침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신고가 막 나의 고마운 키다리 아저씨, 그랜트 씨로부터 되어있는 상태이었던 것이다.
|잔난감 사러 갔떠요|
아이가 없어진 지 네 시간 만에, 때구정물을 얼굴에 잔뜩 묻히고, 그 큰 사탕은 벌써 반이상이나 먹어버려서 입가엔 캔디의 무지개색이 물들고, 울어서 눈이 부은 백옥같이 희고 너무도 가여운 나의 둘째 아들 원이는 경찰 두 명, 그렇지만 절대 놓지 않는 한국 카페 사장님의 손을 잡고 엄마의 초밥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는 아기 원이를 끌어안고 물었다.
"원아 대체 엄마도 없이 어디를 갔었어. 엄마가 원이 없어져서 많이 놀래고 울었어"
그러자 아기 원이의 대답은
"잔난감 자동차 사러 갔떠요"
가엾은 나의 세 살 베기가 얼마나 심심하고, 오래 기다렸고 참다 참다못해, 혼자서 그 위험한 차량통행이 가장 바쁜 사거리를 지나서....
|엄마는 초밥 만들어요 계속 만들어요|
한국말만 조금 이해하고 할 줄 아는 세 살 원이에게 한국 카페 사장님께서 물어보셨다고 한다.
"엄마는 어디 있어? 아기야 엄마는?
그러자 원이는 가엾게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엄마는 초밥 만들어요 계속 만들어요"...
외국땅에서 허무하게 잃어버릴 뻔한 세 살 베기 원이을 정말 기적적으로 네시간만에 찾았는데……
그로부터 몇 달 뒤에 나는 원이를 25년 간이나 다시 잃어버리게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기적적으로 찾게 되었다...
우리 가족의 기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제는 행복한 기적만이 생겨나기를...
**이미지: Pexel,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