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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alie Sep 07. 2024

|뚱클럽 1|

  -너와 나의 리즈시절-

내가 타고난 기초대사량이 남달리 좋은 건지 아니면

원래 느긋한 성격이 아니다 보니 남보다 활동량도 어마어마해서 그런지,

(실제로 현재 약국에서 하루 12시간을 근무하는데 보통 8킬로에서

많게는 10킬로 이상을 약국 안에서 걷고 있다),

나는 뚱클럽 중에서도 가장 엄청난 먹성, 식성 그리고

식탐을 자랑했던 멤버였다. 그렇지만 늘 마른 체질을 가지고 있어서

 다들 그 음식, 간식 다 어디 갔냐고 했었지만 그 이유는 충분히 차고도 넘친다.




  아무도 못 따라오도록 빠른 나의 큰 보폭의 성큼 걸음으로도

  버스에서 내려서 20분 이상을 가파른 등산을 해야 하는 곳에 위치했던

  상명 여대 부속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6년간 다녔고,

  집도 홍제역에서 내려서 문화촌에 위치한 집까지 걷고,

  또  높은 비탈길의 언덕까지 40분 거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뛰어서 왕복하던 나의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아마 엄마 아버지 두 분 다 약간 급한 성격이셔서 일까,

 나는 모든 걸 빨리 하는 조금도 "정"의 상태인적이 없는

 그야말로 몸을 깨있는 동안은 쉴 새 없이 강행군시키는

  사람이란 사실도  것도 최근에야 나와 상반되는 느긋한 성격의

  약대 동생이 알려주어서 알게 되었다.




아, 먼저 나만 아는 이 "뚱클럽" 이 어떤 단체인지 설명을 해보자면,

나와 나의 절친 3명, 총 4명으로 이루어진 네 명의 여성의 행복모임이다.


 우리는 같은 교회를 다녔고, 나이도 한두 살 차이 나는 또래이고,

여행도 맛집도 늘 같이 다녔고,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를 "뚱"이라는 접미어를 붙여서 부르다가,

우리의 모임이 자연스레  "뚱클럽"이라 명명되었다.


.



살짝 통통한 두 명을 제외한 나와 민희는 보통 체격이었지만,

열렬히 이 클럽에 열정과 소속감을 또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성 뒤에 "뚱"을 넣어서 애칭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일단 나는 천뚱, 내 친구 서뚱, 동생 홍뚱 그리고 또 우리 클럽 막내  김뚱,

 이렇게 우리 네 명은 같이 교회에서 여성 4 중창단으로도 활동하였고,

 돈이 없던 대학생 시절에는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우리 교회가 소유한 수련회장 옆 작은 시골집으로

 종종 같이 여행을 가고는 했었다.


  그 시절 우리는 정말로 행복했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웠고,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추억들을 나누었던 "뚱클럽" 친구들은

  나의 20대의 "행복인자"들이다.





힘이 센 뚱멤버는 장작을 패고,

솜씨가 좋은 다른 뚱들은 또 요리를 아주 넉넉하고  푸짐하게 만들어서는,

그것도 가마솥에 땔감을 넣어서 요리한  부대찌개에

엄청난 양의 라면 사리, 햄 등 을 넣고,  또 가마솥밥까지

넷이서도 들고는 올 수 없는 양을 다 먹어 치운 우리 네 명의 "뚱"들은,

 숨을 쉬기 조차 너무 힘들어서 일단은 벽을  하나씩 꿰차고

기대어 잠시 만복을 회복하고는, 식후 운동을 시작하였다.




우리의 운동은 역시, 춥고 어두운 외부가 아닌 군불 땐

방구석에서 베개로 상대를 세차게 쳐서 쓰러뜨리기,

몸은 말랐어도 억척스럽고 활동적인 내가 다 물리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각각의 기억은 왜곡될 수도 있으니,

뚱클럽 회원 중에서 정정하고 싶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뚱클럽"은 우리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고 황금 같은 20대를 보내는 동안

우리의 가장 신나고, 재미있고,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그야말로 리즈 시절의 특별한 친구들로 구성된 있는

남은 인생동안 다시없을  절친 모임이다 (현재형!)




당연히 우리의 뚱클럽은 아직도 존재하지만,

각자의 삶,  가족 그리고 나는 이 먼 곳 뉴질랜드에 있기에

이제는 한 5년 만에나 한두 번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누군가가 좋은 소식이 생기면 제일 먼저 알리는 절친들이다.




엄마 아버지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신 한국은

슬프게도 나에게는 더 이상

고향 혹은 집 같은 느낌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물론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나를 마음깊이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는 언니 오빠들 그리고 새언니가  있지만,

중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은  오랜 외국 살이동안 소식이 다 끊겼다.


 그렇지만,  내 뚱클럽 친구들은 서로 바쁜 일상 중에서도

 오랜만에 연락을 해도 전혀 부담 없는,

 마음 편하고 따뜻한 "고향" 같은 나의 친구들이다.




우리는 10년 만에 만나도 지난주에 수다 떨다

다시 만난 듯이 편하고 거리감 없는 게 또 하나의 자랑거리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홍은동에 위치해 있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다녔던 교회를 아직도 다니기에

이 친구들을 만나러, 나는 태어난 동네를 가게 된다.

실로 "고향"같은 친구들!




우린 어쩌다 보니 중년의 나이가 되어

그 시절과는 다른 각자의 집안에서 "어른"의 역할을 맡고 있지만,

우리가 "뚱클럽" 모임을 할 때만큼은

우린 다시 스무 살 그때 그대로의 마음, 가슴  

그리고 신남과 수다로 가득 찬 소녀들이 돼버리곤 한다.



내가 40대에 약사가 되었을 때,

내가 50대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을 때,

또 막 약대 준비 중,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슬프고 기쁜 모든 시절에 멀리서도

늘 용기를 주고, 진심으로 그리워해 주고,

같이 울고 웃어준 뚱클럽 친구들,

서뚱, 홍뚱, 김뚱 그리고 나 천 뚱!




우리 "뚱클럽"은 우리 눈감는 날까지 절대 해체란 없다. 만장일치로.


너무 그리운 뚱클럽 회원님들, 내년에 만날 수 있겠지요, 너무 그립고 보고프다 친구들아.


"뉴질랜드에서 천뚱"


**이미지: Pixa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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