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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지키는 힘

수필

by 예원 양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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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우리 집은 사방이 논으로 둘러싸인, 개울가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초가집이었다. 노랑말과 흰말 두 마리는 마당에서 풀을 뜯고, 닭과 오리는 자유롭게 마당과 개울을 오갔다. 볕이 잘 드는 마당과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조용하고 소소한 일상이 잔잔히 흘러갔다.

아버지는 집 앞의 논농사를 지으며, 동네 집집마다 짠 가마니를 도매로 사들여 머슴 아저씨와 함께 두 마리 말이 끄는 구루마에 싣고 군산에 가서 파셨다. 가끔 오빠의 학교 결석 문제로 부모님의 다툼이 잦을 때면, 어머니의 깊은 한숨 소리가 마당 끝까지 들려오곤 했다.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처가에서 힘들게 사시는 외가 식구들을 생각해 추수 후엔 쌀을 짊어지고 직접 갖다 드리곤 하셨다고 한다. 내가 열이 나 아플 때면 밤새 내 이마를 짚으며 걱정하시고, 한밤중 깜깜한 어둠을 뚫고 자전거를 타고 약을 지어 오셨다. 열이 내리면 내 곁에 누워 밤을 함께 지새우셨다.

그 모든 시간은 마치 늘 돌아가는 시계처럼 규칙적이고 단단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언제나 부모님이 계셨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표현이 서툴렀다. 외박하는 일도 없이, 군산에서 일을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 단조롭고 무던한 일상이 곧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의 방식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믿고, 자식들을 위해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밥상을 차리고 등굣길을 챙기셨다. 큰언니와 함께 가마니를 짜고 논일도 도우셨다. 몸과 마음이 고단했을 텐데도, 힘들다는 내색을 한 번도 하시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사랑은 희생이 아니라, ‘가족이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부모님 사이에서 자란 나는, 그 모든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그 ‘당연함’이 얼마나 특별하고 귀한 것이었는지를.

내 친구 중에는 부모님이 이혼해 할머니와 사는 친구도 있었고,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 채 떠돌아다니는 아이도 있었다.

그처럼 누군가는 상처 많은 가정에서, 또 누군가는 무너진 일상 속에서 자라났다는 걸 알게 되면서, 우리 집이 비록 완벽하진 않았지만 내게는 누구보다 단단한 울타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결혼 후 아이를 키우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내게 하신 말씀이 지금도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

“너희 아버지는 평생 바람 한 번 피운 적이 없어. 나는 그거 하나만으로도 감사해.”

그 한마디는 내 마음에 박혀 오래도록 울림이 되었다.

요란한 사랑도, 특별한 이벤트도 없었지만, 부모님은 서로를 향한 신의를 지켰다. 말 한마디 없이 지나가는 날에도, 감정이 오가지 않는 밤에도, 각자의 자리를 묵묵히 지켰다.

그 ‘자리’라는 것이 말보다 더 강한 신호가 되어 우리 형제들에게 삶의 기준이 되어주었다.

사랑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누군가에겐 설렘이고, 또 누군가에겐 다정한 추억이지만, 우리 부모님과 나에게 사랑은 ‘신뢰’이자 ‘책임’ 이었다. 부부로서 신뢰를 지키고, 그 신뢰에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곧 사랑이었다.

아버지는 늘 그 자리를 지켰고, 어머니는 그 자리를 믿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 하나가 두 사람을 이어주었고, 그 끈을 붙잡은 손은 바로 신뢰였다.

그런 부모님의 삶을 보며 나는 배웠다. 아무리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중심이 버텨주면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요즘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호적’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가족부’로 대체되었으며, 비혼과 이혼, 혼외자 문제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해졌고,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인식도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형태는 바뀔지언정,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키는 중심의 힘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는 부부 간의 신뢰와 책임이 부재할 때 균열이 생긴다. 나는 믿는다. 부부가 서로에게 충실하고,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 비로소 ‘행복한 가정’이라 부를 수 있다고.

돈이 많거나, 자녀가 잘났거나, 집이 크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머무는 평안함, 그것이야말로 진짜 행복이다. 그리고 그 힘은 부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요즘은 신뢰도 돈이면 해결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중심을 지키는 힘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삶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바람을 몰고 온다. 그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필요하다.

그 중심은 약속을 지키는 일, 자리를 지키는 마음, 그리고 서로를 향한 따뜻한 눈빛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로를 지켜주는 두 사람이 있을 때, 그 집은 오늘도 조용한 평온과 안식을 품고 있을 것이다.

2025-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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