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덕
겨울은 길고 추웠어요. 차가운 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고,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든 날들이 계속되었지요. 나는 매일 두꺼운 외투를 입고 학교에 다녔어요.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늘 봄을 기다리는 작은 설렘이 있었어요.
그 겨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어요. 아침에 눈을 떠도 흐린 하늘뿐이고, 쌓인 눈은 쉽게 녹지 않았어요. 언제쯤 따뜻한 햇살이 내 볼을 간질일까. 길고 지루한 겨울날, 나는 창가에 앉아 깊은 한숨을 쉬곤 했어요. 나는 우리 집 옷장 속에 고이 접혀 있는 노란 스웨터와 파란 주름치마를 바라보며 또 한 번 봄을 그려보았어요.
옷장 속에는 내가 가장 아끼는 옷이 있었어요. 서울에서 전학 온 내 짝꿍이 입고 있던 노란 스웨터와 파란 주름치마를 엄마를 졸라 사달라고 했을 때 사준 옷이었어요. 노란 스웨터를 입으면 마치 햇살이 내 몸을 감싸는 것 같았고, 파란 치마를 입으면 하늘을 품은 듯 가벼운 기분이 들었어요. 하지만 아직은 입을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 아쉬웠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고민 끝에 작은 결심을 했어요. 남들보다 조금 빨리 봄을 맞이하기로요. 고지식한 우리 아빠한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옷장에서 봄옷을 꺼냈어요. 그리고 아침, 나는 두꺼운 겨울옷을 벗고, 노란 스웨터와 파란 주름치마로 갈아입었어요. 거울이 없어도 알 수 있었어요. 지금 내 모습은 분명 봄을 닮았을 거라고요.
나는 아빠 눈을 피해 밖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골목길을 걸었어요. 차가운 바람이 옷 사이로 스며들었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했어요.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한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얘야, 감기 들라, 춥지 않니?” 하고 물으셨지만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어요.
“아니에요. 저는 봄을 입었어요.”
마치 내가 먼저 봄이 된 것처럼, 개나리가 피기도 전에 봄을 알리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밖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께 결국 들키고 말았어요.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너 이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아빠는 놀란 얼굴로 내 손을 잡아끌고 집으로 가셨어요. 그리고 나의 옷을 벗겨 옷장 속에 다시 넣어두셨어요. 나는 울먹이며 소리쳤어요.
“아빠, 미워! 아빠는 내 마음도 모르면서...”
나는 처음으로 아빠한테 소리를 지르며 울었어요. 울며불며 다시 그 옷을 입겠다고 떼를 썼어요. 아버지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시다가, 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어요.
“봄은 기다리면 언젠가 오게 되어 있다. 하지만 네 마음속 봄은 네가 만들 수 있는 거란다.”
나는 그날 밤 꺼낸 봄옷을 다시 곱게 접어 옷장 속에 넣었어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봄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떻게 하면 내 안의 봄을 키울 수 있을까 하고요.
아빠의 말이 내 마음에 남았어요. 나는 고민했어요. 내 마음 속 봄을 만든다는 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하면 봄을 빨리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깨달았어요. 내 안의 따뜻한 마음이 봄이 될 수도 있다는 걸요.
나는 봄을 기다리는 대신 봄을 만들기로 했어요. 먼저 오빠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대던 말을 부드럽고 다정하게 건넸어요. 동생과 장난감 놀이도 함께했고, 맛있는 것을 양보도 했어요. 부모님께는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며 먼저 인사를 했어요.
학교에서도 조금씩 변화를 시도했어요.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안부를 묻고, 고민이 있어 보이면 조용히 들어주었어요. 선생님께도 “선생님,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인사드렸어요. 작은 변화들이 모이자, 친구들의 반응도 달라졌어요. 늘 조용했던 친구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고, 반 친구들은 내 주변에서 함께 웃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친구들에게도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했지요. 때로는 작은 선물도 주었어요. 길고양이한테도 “나비야, 안녕?” 하며 관심을 가져주었어요. 먹이를 주기도 했고요. 그렇게 나는 매일 작은 친절을 실천했어요.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날씨는 여전히 추웠지만 내 주변이 점점 따뜻해지는 걸 느꼈어요. 오빠와 동생이 내게 먼저 부드러운 마음으로 다가왔고 친구들은 더 자주 내 곁에 모였어요.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시며 “우리 딸, 사랑해.” 하며 활짝 웃으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가는 길에 작은 꽃봉오리를 발견했어요. 여전히 찬 공기가 남아 있었지만, 꽃봉오리는 힘차게 피어나려 하고 있었어요. 나는 조심스레 꽃봉오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어요.
“곧 봄이 올 거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봄이 왔어요. 나뭇가지에는 연두색 새싹이 돋았고, 개나리가 길가를 노랗게 물들였어요. 나는 드디어 노란 스웨터와 파란 치마를 꺼내 입었어요. 아빠와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야, 우리 집에도 봄이 활짝 폈네!”
하지만 이제 나는 알았어요. 봄은 단순히 따뜻한 날씨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라는 걸요. 작은 다짐과 따뜻한 마음이 있다면, 언제든 봄은 내 곁에 있다는 것을요.
이제 나는 안다. 봄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걸.
나는 날마다 내 안의 봄을 꺼내 입기로 했어요. 그리고 이젠 다른 사람들의 봄도 찾아주기로 했어요. 친구가 힘들어하면 따뜻한 말을 건네고, 우울해 보이는 동생에게 장난을 쳐 주었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느꼈어요. 내 안의 봄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걸요.
그렇게 내 봄은 언제나 계속될 거예요. <끝>
<월간 순수문학 2025년도 5월호 어린이달 동화 특집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