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누군가의 마지막은 말이 없지만, 모든 것을 말해준다.
시어머니는 불꽃 앞에서 지난날의 애착을 내려놓고 계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떠남’의 또 다른 이름이 '비움'임을 깨달았다.#
여름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저물어가던 저녁, 구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니는 장롱을 뒤적이더니, 옷가지들을 하나씩 꺼내 마당으로 나가셨다. 미리 피워놓은 장작더미 위로 오래도록 아껴두었던 옷들을 조심스레 넣기 시작하셨다.
세월의 정이 밴 옷가지들은 시뻘건 불꽃 속에서 하나씩 사라져갔다. 거실에서 문밖으로 나오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물었다.
"어머님, 왜 이 옷들을 다 태우세요?"
시어머니는 슬픔 어린 얼굴로 대답하셨다.
"나 죽으면 다 소용없지. 내 것들, 내가 다 태우고 갈란다. 너희들은 안태울 테니…"
담담하게 말씀하셨지만, 눈빛에는 저승으로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아쉬움이 번져 있었다.
불길 속으로 옷을 하나씩 넣으실 때마다 시어머니는 말을 이으셨다.
"이건 너희들이 사준 옷이고, 저건 네 시아버지가 어디 갈 때 곱게 입으라고 사준 옷이다…"
말씀을 하시다 말고, 시어머니는 흐느끼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 아버님이 보고 싶으세요?"
잠시 침묵을 지키시던 시어머니는 결국 엉엉 소리 내어 우셨다.
"보고 싶으면 뭐 하겠니…"
나는 시어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여위고 굽은 어깨가 내 품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더니
하염없이 타오르는 불길 옆에서, 불길만큼이나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셨다.
나는 시어머니의 등을 조심스레 다독였다.
"괜찮아요, 어머니. 괜찮아요."
손끝에 앙상한 뼈가 만져졌다.
"네 시아버지도 참 고생 많았어."
울음 사이로 시아버님에 대한 연민을 토로하시며 말씀을 이으셨다.
"딸만 낳는다고 집안 어른들한테 구박도 많이 받았어. 그래도 참고 견디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다 떨쳐버릴란다."
마지막 남은 옷 한 벌이 불 속으로 들어갔다.
붉은 혀를 길게 뻗으며, 불꽃은 시어머니의 지난 세월을 삼키듯 타올랐다.
잠시 후, 시어머니는 조용히 당부하셨다.
"내 통장에 돈 조금 있으니, 나 죽으면 문상 오는 동네 사람들 섭섭하지 않게 밥상 잘 차려줘라."
말씀을 마친 시어머니는, 마치 할 일을 모두 끝낸 사람처럼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셨다. 마음속 사랑과 고통, 집착과 연민으로 얽힌 긴 세월을 조금씩 비워내고 계셨다.
시어머니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오래전, 시어머니는 삼베로 수의를 해놓으셨다.
국립묘지에 계신 시아버지 곁으로 가실 준비까지 모두 마친 채였다.
지금은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님.
처음엔 "절대로 요양원에는 안 간다,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 고 완강히 거부하셨다. 그러나 시골집에서 홀로 지내며 거동이 불편해지자 외로움에 자주 눈물을 보이셨다. 결국 자식들이 설득해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다.
요양원 생활이 익숙해진 지금, 시어머니는 웃으며 말씀하신다.
"집에서는 사람 하나 볼 수 없었는데, 여기선 사람이 많아서 좋다."
시어머니의 마지막 인생을 지켜보며, 나 역시 내 삶의 끝을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방마다 가득한 책들과 옷가지들. 앨범. 컴퓨터 내용을 정리하는 일이다.
둘째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병원에 남기는 일이다.
마지막으로는, 아프지 않고 노년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 또한 요양원은 가지 않겠다고 다짐해보지만, 시어머니를 보며 장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시어머님이 계시는 요양병원에 면회를 가면 묻는다.
“어머니, 저 누구예요?”
그러면 힘겹게 대답하신다. “큰며느리...”
그 소리에 마음이 아리지만, 살아 계신 동안 큰 병 없이 평안하시기만을 바란다.
인생이란 결국, 젊은 날 쌓아둔 것을 하나, 둘 덜어 내며 인생을 떠날 준비를 배워가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님의 뒷모습은 말없이 그 사실을 가르쳐주셨다. 무언가를 간직하는 일이 사랑이었다면, 그것을 내려놓는 일은 용서이자 평화일 것이다. 나도 언젠가 그 길을 걸을 텐데, 그때는 덜 두렵고, 덜 미련스럽기를. 그러기 위해, 오늘을 더 단단히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해본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