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태풍을 견딘다는 것에 대하여
태풍이 잠잠해진 오후, 집 앞 노태산을 올랐다.
고은 시인이 ‘순간의 꽃’에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 했던가.
산을 내려오는 길, 오를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굴참나무였다.
태풍이 오기 전, 굴참나무는 촘촘한 가지에 두툼한 잎새와 작고 납작한 도토리를 품고 있었다.
그 곁에 함께 있던 갈참나무는 조금 더 얇고 길쭉한 잎을 달고, 도토리는 길쭉하게 빠졌으며, 상수리나무는 잎이 둥글고 크며, 그 열매는 마치 작은 공처럼 둥글었다.
모양도 생김새도 다른 나무들이지만, 굴참나무는 유독 투박하고 단단해 보였다.
태풍이 지난 후 굴참나무는 처참했다. 몸통은 찢겨지고 꼿꼿하던 중심 가지와 작은 가지들이 꺾이고 부러져 있었다. 주변 다른 나무들보다 훼손이 심했다. 그 모습이 마치 생명이 다한 나무 같았다.
그러나 굴참나무는 티라노사우르스의 발 같은 뿌리로 흙을 단단히 움켜쥐고 상처난 껍데기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갈참나무는 몸을 부드럽게 흔들며 고요히 수그러들었고, 상수리나무는 묵직한 몸통을 웅크리듯 견디고 있었지만, 굴참나무는 혼자만 몸부림치며 우는 듯한 소리를 냈다.
예사로 지나치려 했지만 구시렁 거리는 소리에 발을 멈췄다.
소리는 나무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예민해진 귀를 쫑긋 세우고 자리를 잡고 앉아 들어보았다.
“네가 아무리 심술을 부려도 헛수고야.
나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아.
달콤한 향기를 품고 다가오더니, 결국 태풍으로 돌변해서 나를 망가뜨린 넌… 본성부터 악마였지.”
굴참나무는 상처 입은 몸으로 분노를 허공에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디선가 명상 음악 같은 미풍이 불어와, 흔들림을 멈추고 가지를 모았다. 기도하듯이.
“운명의 여신이여,
저를 이렇게 만드신 이유가 있습니까?
한 번뿐인 생으로 푸른 가지를 가꾸며 자라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실 순 없었습니까?
저는 그저 거목이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잎사귀 몇 장이 떨어졌다.
비에 젖은 듯한 침묵 속에서 굴참나무는 기도하듯 속삭였다.
“상처를 견디고 다시 자라겠다는 이 마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뿌리째 흔들렸던 이번 태풍이 마지막이기를 바랍니다.
다시 힘을 내어 살아보겠습니다.”
굴참나무는 가지를 치켜세웠다가 꺾이며, 상처의 무게를 고요히 견디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리가 부러져 일어서지 못하는 나무, 쓰러진 채 마지막 가지를 지키는 나무, 옆 나무에 기대 겨우 버티고 있는 나무들…
모두 제각각의 방식으로 휘청이며 견디고 있었다.
태풍에도 살아남는 나무들이 있다.
바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꺾임을 실패로 여기지 않으며, 상처를 끌어안고 다시 뿌리를 다잡는 나무들.
그런 나무들이 이 숲을 푸르게 지켜낸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무들은 이미 사라졌다.
굴참나무가 바람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바람조차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꺾이고 부러진 가지들을 실패가 아니라, 더 깊은 성장을 위한 과정으로 여겼기에 굴복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상처는 피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살아 있다는 가장 깊은 증거였다.
결국 굴참나무는
꺾인 가지 너머로 더 높이 뻗어갈 줄 아는 나무였다.
상처를 품고도 잎을 틔우고, 흔들려도 끝내 뿌리를 놓지 않는 존재.
그래서 오늘도, 굴참나무는 조용히 세상을 푸르게 지켜내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