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다시보는 그림들

by 락부락부

한동안 꺼내보고 싶지 않았던 그림들이 있다.


벽에 걸어두지도 않았고, 누구에게 보여준 적도 없다. 애써 기억 바깥으로 밀어낸 시간들.


그 중 하나는 예전에 다녔던 회사다.


작고, 시스템도 없고, 사람은 금방 그만뒀다. 사무실 분위기는 늘 어수선했고, 나는 그 안에서 더 작아졌다.

그곳에서 일했던 걸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을 때 회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지금은 누군가 "어디서 일했어요?" 하고 물으면 몇 개의 이름을 건너뛰고 대답했다.


그게 더 편했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내가 거기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모를 테니까.


또 하나의 그림은 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아버지였지만, 그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가 얽혀 있었다.


어릴적 감정을 표현하면 유난스럽다는 말을 들었고, 항상 웃는 얼굴로 맞춰줘야 조용히 지나갈 수 있었다.


무엇이 진짜 문제였는지 설명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가스라이팅, 나르시시스트 같은 단어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고, 그 단어들이 내가 느꼈던 것에 가까웠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많은 게 지나간 뒤였다.


그 시절의 나는, 매일 무언가를 견디고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조용히 삼켰고, 확신 대신 눈치와 예측으로 움직였다.


그게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내 성격처럼 굳어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그 시간을 통해 뭔가를 배우고 있었다.


사람을 조심스럽게 보는 법, 기대를 낮추고 버티는 힘,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을 스스로 찾아내는 감각. 그건 흔히 말하는 ‘회복’은 아니었다.


차라리 훈련에 가까웠다.

불편한 상황에 적응하고,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달라졌다.


지금은 좋은 회사에서,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다.


말을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 일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나아오다 보니 예전의 그림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숨기고 싶었던 기억들이, 이제는 조금은 다른 얼굴로 보인다.


그림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그걸 바라보는 내가 달라진 것이다.


지금은 생각한다.


그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라고. 불완전한 공간에서도 자라는 법을 배운 그 시절이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그래서 요즘은 가끔, 그 오래된 그림들 앞에 다시 서본다.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본다.


그림 속 나는 분명 서툴렀고, 때로는 지나치게 참았고, 아무도 몰랐지만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다.


이제는 말해도 괜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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