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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린남 Aug 08. 2020

비우지 않기로 했다가 마음을 바꿨다.

이토록 가벼운 내 마음

며칠 동안 머릿속에 맴돌던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위에 앉았다. 주제는 내가 비우지 않기로 결정한 ‘12개의 노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게 남겨져 있는 물건들을 보면서 습관적으로 비워야 할지, 계속 남겨두어야 할지 고민하는데, 노트는 언제나 남겨두는 쪽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나에게 중요한 기록들이라는 확신이 있었을 뿐.


주방에 있는 작은 창고에서 11개의 노트를 꺼내와 책상 위에 펼쳐 두었다. (나머지 하나는 새로 구입한 파란색 로이텀 노트. 언제나 책상 위에 있다.) 글을 쓰기 전에 12개의 노트들을 한 번 훑어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가진 노트들은 성인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써 온 노트들이다. 나의 20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대학생의 나. 직장인의 나. 호주에서 지낼 때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까지. 나의 긴 시간들이 기록되어있을 노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설레는 마음으로 21살 대학생 시절에 쓰던 노트부터 차례대로 펼쳐본다.


어느 날에는 그날의 감정을 구구절절 쏟아내는 일기를 쓰다가, 어느 날에는 교양이나 전공과목의 필기를 적어뒀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 티가 팍팍 나는 성의 없는 필기였다. 친구들 얼굴을 잔뜩 그려놓기도 했고, 꼼꼼하게 낙서를 해두기도 했다. 사고 싶은 물건의 리스트가 적혀 있기도 했고, 해야 할 일을 적어두기도 했다. 몇 개의 노트는 3분의 2 지점부터 깨끗하게  비워져 있기도 했다. (정말 나답다. 미리 사둔 새 노트를 쓰고 싶어서 얼마나 마음이 조급했을까.) 모든 노트는 비슷한 모습이었다. 정신없고,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내가 점점 흑화 했다는 거다. (흑화의 절정은 직장인 시절이다.)  


노트를 통해서 나는 다시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그때에만 느낄 수 있던 불안한 감정들과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글자들 틈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이제야 그때의 나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을 그때의 나.


‘외로웠구나. 힘든 시간을 보냈구나.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구나. 바꾸려고 했구나. 다짐했구나. 원하고 바랐던 많은 것을 이루지 못했구나. 그럼에도 무엇인가를 계속했구나. 바꾸었구나. 뭔가를 얻었구나. 이렇게 내가 되었구나.’


이때의 수많은 삽질과 말도 안 되는 꿈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로 인해 내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그때의 나를 이제라도 위로할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생겼다. 노트를 보기 잘했다고, 남겨두길 잘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노트를 비우기로 마음을 바꿨다. 분명 비우지 않기로 결정한 물건에 대해 글을 쓰려고 했는데?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지만, 짧은 시간 안에 나는 나름의 이유까지 만들었다. 첫 번째는 노트의 내용이 낙서나 의미 없는 끄적임이 반 이상이라는 이유(예를 들면 대학시절 필기), 두 번째는 기대보다 건질 게 없었다는 이유였다. 대단하고 가치 있는 기록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나간 시간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일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기록은 얼마 없었다. 그저 배출을 위한 낙서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에게 배신당한 기분이다. 이 12개의 노트가 나에게 중요한 물건이라고 확신했는데! 


그래서 마음을 바꿨다. 비우기로. 곧바로 노트들을 다시 살피며 비울 것과 남길 것들 구분했다. 남겨둘 노트는 원래 있던 자리에 넣어 두었다. 비워낼 노트 중에서 남기고 싶은 기록들은 잘라냈다. 그리고 디지털 화 시켰다. 빈 문서 위에 하나씩 타이핑했다. 꽤 긴 시간을 들여 옮겨 적었다. 이렇게 옮겨두면 나중에 가끔씩 읽어볼 수 있어서 좋다. (예전부터 짧은 기록들을 도큐먼트 파일로 모아두는 습관이 있다.) 옮기기 어려운 기록은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방금 옮겨 적은 도큐먼트 파일과 같은 폴더에 넣어주었다. 사진들은 다시 꺼내볼지는 의문이지만, 지금의 내가 원하는 방법이었기에 이렇게라도 남겨두려고 한다. 


내가 가진 12개의 노트 중 반이 떠났다. 그간 나에게 따뜻함을 내주었던 노트는 떠나는 와중에도 나에게 몇 가지를 알려주었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글을 써왔다는 것을,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내가 빈 곳을 채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비우지 않기로 했던 노트를 비워낸 것이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떤 물건이든 비우고 나면 후련한 마음이 더 크다. 지금의 시간을 들여서(거의 반나절이 걸렸다.) 지난 시간을 정리할 수 있었고, 지금에 확신을 얻었다. 또 하나의 다짐을 하기도 했다. 내일의 나와 더 먼 미래의 나를 위해, 꾸준히 일기를 써야겠다는 것.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또다시 기억해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의 내가 별거 아닌 기록에도 힘을 얻은 것처럼. 미래의 내가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니까. 


에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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