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영어보다는 전투 영어를
호주에 산지 2년, 사람들은 내가 영어를 잘 할 거라고 생각할 테지만,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 호주에 와서 살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감은 있었다. 워킹홀리데이로 지냈던 10개월 동안 '생존 영어'를 습득하기도 했고, 영어 앞에서 용감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호주로 이사 오고나서부터는 오히려 자신감, 용감함이 사라져 갔다. 이유는 이렇다. 용감하게 뱉었던 영어가 틀렸다는 것을 인지 하기 시작했다. 틀린지도 모르고 뱉었던 시절에는 틀리던 말던 막무가내식이었지만, 어느 정도 영어를 알듯하니, 틀린 영어를 하는 내가 너무 부끄러워 입을 점점 닫게 되었다. 듣는 귀는 열렸지만 말하는 입은 열리지 않았고, 머리로 아는 영어와 직접 할 줄 아는 영어의 사이의 괴리감이 생겨버린 것이다. '나 영어 좀 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던 내가 '나 영어 진짜 못해'라고 말하며 역진화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하려면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내 생각도 그렇다. 영어 공부를 한다면 본토에서 하는 편이 좋은 것 같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지내거나, 학교를 다닌다거나, 현지인들과 함께 일을 한다면, 영어를 금세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세 가지 중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의 영어 수준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내가 잘하는 영어라고는 주문하기, 물건 사는 것 등의 기본적인 생활영어 수준이다. 다행히 이 정도 영어 수준은 친구나 가족들이 호주에 왔을 때는 유용하다. 적어도 밥은 잘 시키고 물건은 잘 사니까.
지난 8월부터는 무료 영어 수업을 나가보려고 했는데, 가지 않았다. 학교, 학원을 싫어하는 병이 있어서 그런지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에게 혼자 하겠다고 선전포고 하고서는 매일 넷플릭스를 켜놓고 드라마로 공부 중이다. 나랑 잘 맞는 영어 공부 방법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합리화해본다. (실제로 나랑 잘 맞기도 하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을 한 지는 얼마 안 되었다. 이 다짐은 일 년 전쯤 있었던 '한 사건'의 때문에 시작되었다. 일 년 전 어느 날, *유닛 관리인 애이듀리안이 집으로 찾아와 말했다. "며칠 전 배수관이 막혀서 플럼버(Plumber)를 불러 고쳤는데 물티슈 같은 게 잔뜩 나왔어." 나는 그 말에 "아, 진짜?"라고 답했다. 그는 "누군가 변기통으로 물티슈를 버려서 막힌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 물티슈를 버리면 안 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다 알아듣고는 고작, "오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애이듀리안이 돌아간 뒤 나는 뒤늦게 화가 났다. 물론 나 스스로에게. 애이듀리안이 하는 말에 내가 확실하게 말했어야 했다. 우리 집에서는 물티슈를 변기에 버리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 뒤로 시간이 꽤 흐른 얼마 전에 일이다. 집에 애이듀리안이 찾아왔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애이듀리안은 "1층 현관에 설치된 작은 조명이 깨져서 새로 바꿨어."라고 말했다."그랬었냐."하는 내 말 뒤로 애이듀리안은 이런 말을 했다. "며칠 전에 바람 많이 불 때 혹시 너네 빨래 건조대 날아가지 않았어?"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단호하게 "아니, 그런 적 없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너네 빨래 건조대가 바깥으로 떨어지면서 조명을 부순 게 아닌가 싶어서." 그 순간. 아, 이 할아버지가 상상력이 풍부하시네 라고 생각해서 웃음이 났지만 나는 단호하게, "아니 절대 그런 적 없어."라고 말했는데 같은 말을 또 반복하는 것이다. 마치 취조하듯이. 내가 영어를 잘 못 알아듣고 있다고 생각한 것 일까. 나는 반복된 대화에 피로해져서, 애이듀리안에게 말했다. "남편에게 전화할 테니 통화해봐." 그리고 휴대폰을 애이듀리안에게 건넸다. 애이듀리안은 남편과 통화를 하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얼마 뒤, 남편과의 통화를 끝낸 애이듀리안은 내게 폰을 건넨 후, 미안한 기색 없이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100% 우리를 의심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일어날수도 없는 망상으로 유추한 이유로 말이다. 미안한 기색도 없다니. 폰 너머에 남편도 애이듀리안에 태도에 약간 흥분한 듯 보였다.
나는 또 화가 났다. 이번엔 나 스스로에게로 향한 화가 아닌, 스스로 상상한 이유로 우리를 의심한 애이듀리안을 향해서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답변을 했지만 '아니, 그런 적 없어.'식의 말이 아닌, 조금 더 명확하고, 오히려 우리를 함부로 의심하는 애이듀리안에게 일침을 가했어야 했는데. 그러다 이 모든 것이 '물티슈 사건'에서 이어진 게 아닌가 싶어 스스로를 자책하기 시작했다. "내가 영어를 잘했어야 했어! 이게 다 내가 영어를 못해서야!" (덧 붙이는 말: 애이듀리안은 평소에는 친절한 관리인입니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 아니 잘해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고,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서 정확하게 내 의사를 전달하고 싶다. 호주에서 살면서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져 한심하기도 하다. 언제까지 영어를 두려워하며 살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는 날을 고대 해본다. 살아남는 '생존 영어'가 아닌, 살아남아 싸워 이기는 '전투 영어'를 목표로 영어 하기로 한다. 억울한 이유로 지는 것은 싫으니까 말이다.
*유닛: 빌라 같은 호주의 집 종류 중 하나.
*유닛 관리인: 유닛을 관리하는 입주민 중 한 사람
글/그림 에린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