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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린남 Feb 05. 2023

수납 장을 함부로 집에 들이지 마시오

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신혼집에서 살게 된 지 5개월 정도 됐을 때쯤이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살던 사촌오빠 가족이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면서 가구 몇 개를 버리게 됐다고 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라는 말에 사촌오빠 집으로 달려갔다. 대부분의 가구를 버리고 새롭게 살 예정이어서 나에게 꽤 많은 선택지가 있었지만,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 검은색 3단 서랍장 단 하나만을 선택했다. 최선을 다해서 서랍장 이곳저곳에 담겨 있는 세월의 흔적을 닦아주고, 침실 벽 한쪽에 배치했다. 검은색 서랍장까지 침실로 들어오니 방이 꽉 차는 기분이었지만, 답답하기보다는 오히려 든든했다.




딱히 필요하지 않았던 물건이었지만 서랍장은 생각보다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우리가 굳이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물건들은 마치 서랍장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어났다. 다른 서랍장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잡동사니가 서랍장 안으로 들어가자 침실이 제법 깔끔해 보이기도 했다. 역시 서랍장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내 선택은 틀렸다. 서랍장을 가져오지 말았어야 했다. 겉으로는 깔끔해 보였지만 단지 물건이 서랍장 안으로 이동해서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서랍장 안에는 규칙도 분류도 없이 널부러진 물건들로 가득했다. 필요한 물건을 꺼낼 때도, 나는 물건들을 뒤적거리며 오랜 시간 헤매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랍장은 엉망이 됐고, 내부를 다시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못 본 체하며 물건을 꺼내고 다시 넣어두는 일에만 집중했다. 어

느 순간부터는 서랍장이 꽉 차서 잘 닫히지도 않았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됐다. 깔끔했던 서랍장 위마저 어느새 지저분해졌다. 미처 서랍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물건들이 서랍장 위를 차지했고, 빈틈없이 올려진 물건들을 잘못 건드렸다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럴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물건들을 집어 들어서는 또 아무렇게나 올려두었다. 가끔씩 대청소 날을 맞이해서 나름대로 분류하며 정리해주었지만, 그날 딱 하루뿐이었다. 물건들은 다시 마음대로 자리를 잡았고, 그 위에 먼지도 부지런히 쌓여갔다. 물론 물건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범인은 따로 있었다. 게다가 공범, 나와 남편!


서랍장이 우리 집으로 온 지 2년이 흘렀다. 공범 아니, 남편과 나는 한마음이 되어 서랍장을 비우기로 마음먹었다. 그 안에 어떤 물건이 채워져 있는지 이제는 알 수조차 없었지만, 오래된 서랍장을 보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우선 서랍장 안에 있는 것들을 바깥으로 다 빼서, 물건들이 돌아갈 곳이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이 물건을 정리해서 다른 서랍장에 정리해야 했다. 그 말은 즉, 꽉 차 있는 다른 서랍장 속 물건들도 긴장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미션은 세 개의 서랍장에 있던 물건을 두 개의 서랍장 안에 나눠 넣는 것! 남편과 바닥에 앉아서 양말, 속옷, 책, 약, 여분의 수건과 그 외의 잡동사니 중에서 남길 것을 골라냈다.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냉정한 마음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니 덩달아 다른 서랍장의 짐까지 줄일 수 있었다.


서랍장 하나만 비웠는데도 침실의 모습이 달라 보였다. 검은색 서랍장이 사라지니 방이 한결 환해졌고 확실히 전과 달리 쾌적했다.

 

이때 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물건을 바닥에 덩그러니 놓아둘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든 비우고 넣게 된다. 앞서 말했다시피 서랍장은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공짜면 좋다는 욕심에, 수납할 공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리가 쉬울 것이라는 착각에, 시간이 흐를수록 짐이 늘어나는 게 당연하므로 새로운 서랍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집으로 들였다. 결국에는 서랍장의 용량만큼 물건이 늘어났고 또다시 그만큼의 물건을 비워내야 하는 수고를 자처했다.


오늘의 교훈.

“서랍방을 함부로 집에 들이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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