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옷이라도 남으니까’라는 착각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기분을 조절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절하지 못하고 옷을 샀다. 월급날에는 기분이 좋으니까 옷을 샀고, 화가 날 때는 나가서 뭐라도 사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당시 다녔던 회사는 신사동 가로수길과 가까웠다). 아무 일도 없지만 지나가는 길에 옷이나 살까 하고 매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물론 비싼 옷은 엄두도 못 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옷들을 사들이며 쇼핑하는 기분만 실컷 냈다.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 사정은 애써 외면했다.
한곳에서 모든 쇼핑을 할 수 있는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명동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머릿속에 계획적인 소비를 위한 쇼핑 리스트를 만들어두고 나갈 때도 있었지만, 쇼윈도에 걸려 있는 큰 광고나 잘 진열된 옷을 보면 홀린 듯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멋진 몸매와 예쁜 얼굴의 모델이 입은 바로 그 옷이 매대에 걸려 있었다. 모델 느낌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나마 나은 모습의 내가 될 것이라고 믿으며 옷을 사들였다. 물론 구매하려고 계획했던 옷은 아니었다. 옷이 나의 겉모습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이나 체형을 바꾸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지만 '예쁜 옷 한 벌’은 상대적으로 쉽고 빠르게 나의 겉모습을 꾸며줬다. 나는 외모의 부족한 구석구석을 채우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옷을 사들였다. 당연히 같은 옷을 입은 모델처럼 될 수는 없었다.
여러 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홀린 듯 또다시 소비를 믿었고, 기대와는 다른 결과에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소비로 채운 믿음은 소비의 기쁨이 떠나자마자 사라지고 말았다. 쉽지 않게 번 돈을 쉽게 허비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로 기분도 나빠졌지만 (먹을 것과는 달리) 옷이라도 남았으니 다행이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그 옷들은 선택받지 못한 채 옷장 안에 쌓여갔고, 빛을 보지 못하고 긴 시간 동안 나를 기다려야 했다.
하나라도 건지겠지?
결혼한 뒤에는 주머니 사정이 달라졌다. 주머니에 구멍 난 듯 이 돈을 쓰던 나는 결혼 후, 성실하게 돈을 관리하는 남편에게 필요할 때마다 돈을 받아 쓰기 시작했다(두 사람 모두 합의한, 모두가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고정적인 월급이 사라진 나는 직장인 시절보다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했지만, 쇼핑과 소비 욕구는 줄어들지 않았다. 변함없이 이전처럼 소비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 나의 소비 레이더는 ‘반값 세일’로 향했다. 호주의 중저가 스파 브랜드들은 한두 달에 한 번, 신상품이 나올 때마다 기존 상품을 30~50% 세일 된 가격으로 판매한다. 그래서 살짝 유행이 지난 옷들을 10~20달러(8,000~15,000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유행이 지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쇼핑 그 자체였으니까!
동네에 대형 쇼핑몰이 있어서 세일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에 ‘반값’이나 ‘할인’이라는 글자가 크게 붙을 때면 얼마나 반가운지. 정신을 차려보면 손에는 몇 개의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이렇게 많이 샀는데도 신상 옷 하나 값이 겨우 넘었다. 완전히 득템한 기분이 들어서 신났지만, 저렴한 가격의 옷들은 한두 번 겨우 입은 뒤 곧 옷장 안에 처박혔다. 유행도 지났고, 내게 잘 어울리지도 않았으며,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나쁘지는 않지만 내가 입기는 싫은 옷이었다.
물론 싼 옷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저렴하더라도 맘에 꼭 드는 옷이나 가격대에 비해 잘 만들어진 옷이라면 나는 꽤 오랫동안 입는 편이다. 저렴한 옷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싸다는 이유로 쉽게 구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싼 옷을 살 때는 이것저것 재고 따지며 수십 번 생각하다가, 매장에서 나와 다른 옷가게까지 둘러보고, 다시 돌아와서도 고민한다. 소비를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저렴한 옷은 가격만큼 쉽다. 소비도, 방치도, 버려지기도. 나는 오랫동안 쉬운 방식으로 소비해왔던 것이다. ‘이 중 하나는 건지겠지’라는 마음이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돈만 낭비한 꼴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내 옷장은 엉망이 됐다. 쇼핑하는 기분을 내기 위해 아무 옷이나 사들여서, 옷이 없는 것보다는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이라도 하나 더 있는 게 낫다며 남겨둬서. 이런 옷장을 보며 내내 남 탓을 했다. 작은 옷장을 탓했고, 제자리에 정리되지 않은 옷을 탓했다. 답답한 옷장을 바꿔볼 엄두도 못 내면서 입지 않을 옷을 또 구입하고, 방치했으며,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거리며 새 옷을 샀다.
이제는 잘 안다. 엉망진창인 옷장은 누구도 아닌 100% 내 탓이었다는 것을. 또한 옷장을, 집을, 인생을 구할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엉망인 옷장을 구해낼 것이다.
…그런데 가능하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