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휴일의 바닷가에서
“고작 바닷가 오는데 무슨 짐을 이렇게나 많이 챙긴 거야? 이사 가는 줄 알았네.”
목적을 알 수 없는 가방들 중 하나를 왼쪽 어깨에 걸치고, 다른 하나는 오른쪽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오른쪽 손에 남은 가방까지 들고서는 백사장 위를 걷다 나도 모르게 신경질을 내버렸다. 누군가에게 닿길 원했던 신경질은 아니었지만 엄마 아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혹시 나의 존재를 잊은 것은 아닐까 궁금하던 차에 엄마와 아빠가 멈춰 섰고,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아들. 이쯤에다 자리 잡을까?”
“그냥 쫌, 아무 데나 앉자고.”
나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는 엄마에게 쌀쌀맞게 대답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까지 우리 가족이 오랜만에 모두 모여 바닷가에 왔다. 엄마 아빠는 바닷가를 좋아해서 주말이면 이곳저곳의 바다로 놀러 다니셨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기를 바랐지만, 나는 바빴다. 친구도 만나야 했고, 연애도 해야 했으니까. 휴일엔 대부분 바깥에서 시간을 보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도 여자 친구인 클라우디아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어야 했다. 오늘은 클라우디아와 만난 지 1년이 되는 날이라, 저녁에는 분위기 좋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예정되어있었다. 쉽게 자리가 나지 않는 곳이라 무려 한 달 전에 예약해둔 자리였다. 그런데 헤어졌다. 바로 어제.
이유는 모른다. 단지 내가 클라우디아의 신경을 거슬리는 행동을 했다는 것만 안다. 평소에 클라우디아는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면 헤어지자고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이유도 모른 채 클라우디아의 마음을 다시 돌리려고 노력했다. 선물을 사서 집 앞에서 기다렸고, 떠나가는 뒷모습을 쫓아가서 빌었다. 떠나지 말라고 말이다. 심지어 우는 시늉까지 했었다. 어제도 별 이유 없이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더니 나를 등지고 떠나갔다. 이번에는 잡지 않았다. "그래. 가라.” 그냥 원하는 대로 보내 주기로 했다. 나도 클라우디아가 했던 것처럼 매정하게 돌아서서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클라우디아와 이별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이른 저녁 풀이 죽어 귀가한 내 모습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 것이다. 분명 나에게 궁금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엄마는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묻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내일 같이 바다 갈래?”
클라우디아와도 헤어졌고, 할 일도 없어졌고, 엄마는 뭔가를 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고, 그래서 대답했다. 가겠다고. 내 대답에 더 이상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일 아침 9시에 출발할 거야.”라는 말만 남긴 뒤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 엄마, 아빠와 바다에 왔다. 적당한 바람이 불고 뜨거운 태양이 온몸에 내리쬐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물놀이하기에 끝내주게 좋은 날씨였다. 방황하던 한 가족이 드디어 자리를 잡았다. 이제 겨우 살았다 싶어 가방을 내려놓으려는데, 가방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아빠는 내 왼쪽 어깨에 있던 가방을 가져가더니 비치타월을 꺼내 백사장 위에 하나씩 깔았다. 동시에 엄마는 내 오른쪽 어깨에 있던 가방을 가져가서 뒤적이더니 선크림을 꺼냈고, 내게 툭 던지더니 바르라고 했다. 우리는 백사장 위에 깔려있는 비치타월 위에 쪼르르 앉아서 각자 선크림을 발랐다. 우리 사이에 감도는 적막이 왜인지 모르지만 어색했다.
선크림을 다 바르고 바다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집에서부터 수영 바지를 입고 와서 민소매 티 하나만 벗으면 끝이었다.
"엄마 아빠는 안 들어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내가 물었다. 아빠는 책을 읽을 거라고 하고, 엄마는 바다에서 노는 나를 구경하겠다고 했다. '뭐야 이럴 거면 왜 왔대.' 기운이 조금 빠졌지만 곧장 파란 바다로 달려가 몸을 담갔다. 처음 발 끝에 닿은 바닷물의 온도가 생각보다 차가웠지만 이내 물 온도에 나를 맞췄다. 파도에 몸을 실었다. 높은 파도가 오면 발 돋음을 해서 파도를 탔다. 즐거웠다. 한참을 놀았다. 그러다 불현듯 엄마 아빠가 누워있는 백사장을 바라보며 두리번거렸다. 나보다 먼저 나를 발견한 엄마가 손을 높이 들고 흔들어준다. 엄마가 흔드는 손에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나도 손을 흔들었다.
잠깐 놀다 온 다는 게 1시간을 넘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고, 비어있는 자리에 누웠다. 어쩌다 보니 엄마와 아빠 사이에 내가 있었다. 이렇게 누워있으니 문득 어릴 적 엄마 아빠와 함께 바다에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는 주말마다 바다에 왔고, 나는 이렇게 엄마 아빠 사이에서 누워있었다. 엄마는 혹시라도 내가 배가 고플까 커다란 보냉백에서 간식을 꺼내 주곤 했다. 평소에는 마음껏 먹지 못할 온갖 달콤한 간식거리들이 나왔다. 그곳에는 엄마가 만든 샌드위치도 있었고, 젤리도 있었고, 잘 깎아 놓은 과일도 있었다. 혹시나 해서 머리맡에 놓인, 내가 손에 들고 왔던 유난히 무거운 가방을 열어보았다. 어릴 적 바닷가에서 내 배를 채워주던 그 보냉백이었다. 엄마는 오늘도 보냉백에 잔뜩 먹을 것을 싸왔다.
“그냥 사 먹으면 되지 힘들게 싸왔어.”
보냉백에 가득 채워진 먹을 것들을 들여다보다 내가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좋았다. 모르겠다. 그냥, 좋았다. 아빠는 아들 덕에 오랜만에 엄마가 이것저것 챙겨 왔다며 좋아했다.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들이 좋아하는 곰돌이 젤리도 싸왔어. 맨 밑에 있을 거야.”
보냉백 안에 내용물만큼 아이스팩이 들어있었다. '이래서 무거웠구나.' 제일 먼저 손이 시릴 만큼 차가워진 스프라이트 캔 하나를 꺼내 마셨다. 먹을 게 눈에 들어오니 왜인지 허기가 져서 곧바로 샌드위치도 꺼내 먹었다. 보냉백 밑에 깔려있던 내가 좋아하는 곰돌이 젤리도 꺼냈다. 엄마 하나 주고 아빠도 하나 주고 남은 것은 내가 다 먹었다. 실컷 먹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엄마 아빠 사이에 누워 어떤 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살갗이 조금 뜨거웠고 입이 바싹 말라서 잠에서 깼다. 물을 마시기 위해 눈을 떠보니 엄마가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엄마의 작은 손은 내 얼굴에 떨어지고 있던 뜨거운 해를 가려주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아저씨라고 해도 믿을 스물다섯의 나이지만, 엄마는 나를 아이 보듯 했다. 혹여 다칠까. 배고플까. 함께 놀러 나와 즐거움을 즐기지도 못하고 나를 신경 썼다. 어릴 적의 그때처럼 말이다. 긴 시간, 엄마 아빠와 함께 하지 못 한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 아빠와 보내는 시간을 언제나 2순위로 밀었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도 사실은 그런 날이었다. 클라우디아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엄마 아빠와 바다에 와서 이렇게 함께 누워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클라우디와의 이별로 오늘은 분명 우울함으로 가득 찰 날이었지만 클라우디아를 한 번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집에 처박혀 있었더라면 얘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시 그녀에게 찾아갔을지도 모르고, 울며 매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를 쫓아 바다에 나오길 잘했다. 이렇게 나오니 그녀가 아니라도 나를 채울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내 휴대폰에서 짧은 알람이 울렸다. 클라우디아가 보낸 메시지였다. '왜 연락 안 해? 우리 1주년이잖아.'라는 메시지를 한참 보다 휴대폰 화면을 끈 뒤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제야 뭔가 잊고 있던 중요한 것이 생각이 났다. '맞다. 레스토랑.'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기뻐졌다. 나는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하고 엄마 아빠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다른 약속 없지? 근사한 곳 가서 저녁 먹자.”
생각지도 못한 내 말에 엄마 아빠는 놀란 듯했지만 이내 얼굴에는 기대감이 차 오른 것처럼 보였다. 아빠는 엄마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보기엔 귓속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 귀에까지 들릴만큼 큰 소리였다.
"여보. 오늘 아무래도 일기 써놔야겠어. 이런 날이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글/그림 에린남
어떤 휴일의 바닷가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담아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