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 나이 12살이었다. 남은 건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남동생 2명이었다. 아버지의 빈자리에는 고스란히 가난이 들어앉았다. 어머니는 억척스러워졌고 누나는 일찍 시집을 갔다. 자전거 한 대로 삼 형제가 산을 넘으며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어땠을까, 나에게도 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나왔지만 억지로 구겨 넣었다. 나까지 구겨지는 줄도 모른 채 구겨 넣고 또 구겨 넣었다.
시간이 흘러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됐을 즈음, 아버지가 그랬듯 나도 아팠다. 아버지와 똑같은 병으로. 나에겐 아내와 어린 자식 둘이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도 이렇게 무서웠을까. 나를 살리려고 어머니는 온갖 방법을 찾아다녔고, 아내는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병간호를 했다. 어린 자식들이 누나 손을 잡고 병문안을 왔을 때, 낯설게 변해버린 나의 곁에서 쭈뼛거리던 아이들을 안아주지 못했다. 가장이었지만 누군가를 돌볼 수 없었다.
병원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죽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지 못한 두 번째 삶을 사는 것만 같았다. 나의 결핍이 우리 가정에 대물림되지 않는다는 것이 기뻤다. 내 아내와 자식들은 나와 다른 삶을 살겠구나, 결국에 가서는 나도 다른 삶을 살 수 있겠구나. 후련하고 홀가분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을 만큼. 새로운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
아빠는 우락부락하고 단단한 화강암을 닮은 사람이었다. 부딪친 건지 부딪힌 건지, 이곳저곳 깨지고 부서진 거대한 바위 같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구석들이 아빠를 더 매섭게 그리고 외롭게 만들었다. 아빠는 아프고 난 이후로 달라졌다. 다들 입을 모아 말할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다가가기 힘들고 무서웠지만, 아빠는 분명 이리저리 깎이며 다듬어지고 있었다.
우리 남매는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다. 다들 지지고 볶고 싸울 때 우리 가족에겐 애틋함의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완벽한 가족은 없고, 우리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주고받은 상처들이 있지만 떨어져 지내는 동안 각자의 파도를 맞으며 둥글게 깎이고 무뎌졌다. 저 깊숙이 가족이라는 파도가 잔잔하고 애틋하게 철썩였다.
나에게 파도는 친구들이었다. 나와는 다른 모양을 가진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있었고 모난 구석은 조금 더 둥글게, 부드러운 구석은 조금 더 윤이 나게 다듬었다. 아빠의 파도는 무엇이었을까? 오빠의 파도, 엄마의 파도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데 아빠의 파도는 도무지 모르겠다. 아빠의 상처는 잘 아물었을까?
아빠는 종종 술기운을 빌려 본인의 상처를 꺼내 보이곤 했다. 40년도 더 지난 일이었지만 여전히 서럽고 분하고 아파 보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좋게 생각하라고 말하곤 했다. 위로랍시고 건넨 말이 아무것도 알지도 못하면서 내뱉는 차가운 말이 되어 아빠를 더 외롭게 만들었을 거란 걸 이제는 안다.
엄마도 아빠도 모두 어린 시절의 상처를 마음에 품은 채 그들의 가정을 꾸렸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상처에 베이기도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내기도 했겠지만, 끝끝내 철썩철썩 서로를 치유하고 다듬어서 이토록 반짝반짝 빛나는 가족을 만들어 냈다. 울퉁불퉁한 화강암을 반질반질한 대리석으로 빚어낸 것만큼 빛나는 일이 있을까. 따듯한 대리석을 닮은 아빠에게 나의 마음이 파도가 되어 닿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