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릴 때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는데
우울함이 온몸을 잠식할 때가 있다.
남자 친구가 우울해하는 나에게 "왜 우울한데?"라고 물었다. 한창 내 우울에 대해 떠들던 나는 그 질문에 잠시 기가 막혔다가, 문득 '그러게 왜 우울하지?' 싶었다.
감정이 아니라 내 상황과 사건에 집중하자 온갖 우울할 것들이 빠르게 휘몰아친다.
직장에서 실수했고 하면 도움이 될 일들을 열 개쯤 찾았지만 한두 개 하고 나머지를 외면했다. 스스로 매일 운동하고자 했으나 이런저런 핑계로 가지 않았고, 매일 쓰겠다던 글도 쓰지 않았다. 지각하지 않겠다던 연초의 다짐도 벌써 무너졌고 이런 김에 다 망해라!라는 마음으로 한 주 내내 침대 위에서 게으르게 보냈다.
그런 내가 미웠다. 하기 싫은 일에 대해 너무나 쉽게 하지 않게 내버려 두는 주제에 주변에 열정 있고 멋진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답을 뻔히 알면서 하지 않고 징징대는 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류의 사람, 그게 나였다.
그래서 우울했다. 찌질한 내가 싫었다.
답이 술술 나왔다.
"그래, 나도 알아. 그냥 하면 되는 거. 하기 싫은 거 이겨내고 해버리면 다 해결되는 거 알아."
어제도 밤을 새우고 일하고 온 남자 친구에게 이런 말하는 게 창피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공감도 질책도 하지 않고 그냥 '그랬구나.' 하면서 운전에 집중했다.
수많은 차들과 스쳐지나가는 건물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무기력해서 그래. 막 뭐가 하고 싶다가도, 어느 날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최선을 다 하지 않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해. 한 순간에 질려서 하지 않아버리는 내가 무서워. 내가 나를 못 믿으니까 뭔가 열심히 해보고자 하는 것도, 하겠다 마음을 먹는 것도 힘들어졌어."
그럼 계속 최선을 다 하면 되잖아.
지긋지긋한 자기 위안을 입 밖으로 쏟아내자마자 내 안의 현자가 대답한다. 여전히 남자 친구는 아무 말도 없다. 아마 대답이 입가에 맴돌고 있을 것이다. 나보다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저 말을 내게 하면 내가 속상할 것도 또 내가 이미 저 답을 알고 있을 것도 알아서 아무 말하지 않는 거겠지.
"나도 답을 아는데, 알면서 하지 않는 내가 괴로워. 이상과 현실이 너무 달라서 무력감이 느껴져."
시작도 끝도 없는 아이러니를 말하며 이만 우울에 대해 입을 닫았다. 이렇게 풀기 쉬운 매듭을 쥐고서 남에게 징징거리는 짓은 딱 한 번이면 됐다.
강변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다른 주제들로 떠들다 보니 우울은 금방 잊혔다. 스스로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런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짧게 나를 스쳤다가 금방 잊힌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원하던 식당 웨이팅이 마감되어 백화점 지하 푸드코트를 헤매고 있었다. 저녁 8시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오늘은 한 끼도 제대로 먹지 않아 배가 고파야 했다.
넓은 지하를 아무리 둘러봐도 먹고 싶은 게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예상치 못 한 순간에 우울이 나를 집어삼킨다. 왜냐고 물어봐도 난 이제 대답할 수 없다. 문제도 알고 해결 방법도 안다. 아니 모르겠다.
먹고 싶은 게 없는데 오만 선택지 사이에서 난 무언가 정해서 꾸역꾸역 입에 욱여넣어야 한다.
난 정말 하고 싶은 게 없는데 하고 싶지 않은 해야 할 것들 투성이다.
난 어릴 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문제였는데.
내가 크면 다 해보고 다 이룰 수 있을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