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다음날

입시를 망친 다음날, 뻔한 결과를 기다리며

by 소근

다음날은 거짓말처럼 맑고 그리고 차가웠다.

아무 생각이 없지만 그 뒤에 숨은, 사실 전부인 망상들이 쉴 새 없이 속삭인다. 내가 두려워하던 부정하던 이야기들을 수억 개의 입으로 수억 번 속삭인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입으로 나는 그만하라는 말조차도 못한 채 다물고 있다. 곧 하나의 입조차 나에게 '저것은 현실이야.' 라며 귀를 막은 내 손을 야금거린다.


수억 개의 입들은 악마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다. 내가 야기한 모든 나로 인한 것들이 뭉치고 뭉쳐 나를 원망하고 있다. 나에게서 나를 감싸는 막은 너무나 얇고도 위선적이다.


이 모든 것은 너의 잘못이기에 너는 저것들의 목소리를 듣고 인정해야 해. 너는 이 위태한 보호 속에서 저것들을 마주 봐야 해.

그 얇은 막은 손대면 찢어질 듯 너무나 얇고 투명하지만 절때 부서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한구석에서는 저것이 그냥 찢어져버려 나를 집어삼켰으면 하는 마음이 아주 작게 그러니까 간헐적으로 나를 기웃거린다.

그런 충동을 무시하며 평온을 가장해도 발작적으로 튀어나오는 원망과 비판이 나를 두들겨대면 나는 힘없이 피를 토한다.

잠에 빠지고 깨는 걸 반복하며 '다시 다시 어쩌면 혹시'를 갈망하고 의심하지만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저 수억 개의 입들이 나를 비웃으며 처참하도록 짓밟는다.


내가 이렇게 침대 속에 정체되어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내게는 현실감이 없는 상황이지만 무서울만큼 아무렇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나의 시간. 이라면서 사실 가증스럽게도 시간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완벽한 개인으로 모두를 유혹하지만 그 누구도 돌보지 않고는 무심히 걸어 나아간다.
시간은 우리에게 무심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간에게 매달리고 애정을 구걸한다. 그것은 실체 없는 신을 믿는 자들의 기도와 믿음과 비슷한 종류일지도 모른다.

내가 쏟은 노력과 시간에 대한 보답은 내 노력도 시간도 돌보지 않는다. 그것들은 정확히 모두에게 같은 양만큼의 아량을 베풀고는 또 사라진다.


노력이 담긴 시간을 언제까지나 쥐고 있지 못하는 텅 빈 나는 속수무책으로 해일에 휘말린다.
해일이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그 무서운 시간들을 다시 한번 겪는 게 무서워진다. 무섭다 끔찍하다.


시간은 달콤하고 가벼운 척 나에게 잠을 선물한다. 나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안식처인 듯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기꺼이 속아준다.

그 끔찍한 혐오와 부정의 굴레가 말로 표현 못 할 만큼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선명했다.
너무나 선명했다. 끊어진 게 분명한 가느다란 희망이었던 것을 붙잡고 있는 내가, 또 그 현실이 너무나 애처롭고도 증오스러울 따름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뻔한 답에 나는 엉뚱한 상상만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