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덕수궁 돌담길 연탄꽃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이야기하다
흙의 감촉을 느끼며 걷는 맨발걷기 지도자 과정에서, 나는 특별한 인연을 만났다. 한 살 어린, 앳된 미소가 매력적인 동생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교육생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맨발로 땅을 밟고 호흡하며 시간을 보낼수록 우리는 나이를 뛰어넘는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해 나갔다.
우리의 첫 만남은 어색함과 설렘이 공존했다. 서로의 이름을 묻고 간단한 자기소개를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그녀의 맑고 순수한 눈빛에 시선이 머물렀다. 나보다 어리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함께 교육을 듣고, 점심시간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맨발걷기에 대한 열정은 물론, 은퇴 후의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과정은 우리를 더욱 가깝게 이어주었다.
오랜 고민 끝에 인간관계 형성에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브랜드 마케팅 MBA 과정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첫 강의가 끝난 화요일 밤 10시, 갈 길이 먼데도 그녀에게 덕수궁 돌담길 걷기를 제안했다. 헤어짐이 아쉽기도 했고, 건강을 챙겨야겠다는 욕심도 있었다.
시청역 근처 빌딩 숲을 벗어나자 마음은 벌써 봄을 챙겨두었는데 꽃샘바람이 매서웠다. 흰청빛 긴 가운 같은 불빛으로 휴식의 시간을 경고하고 있는 돌담길은 요요했다. 저곳에 닿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나? 잠시 갈등 섞인 제어장치가 작동하기도 했다.
순간적인 끌림에 그녀가 이끄는 대로 나는 망설임 없이 내 손을 그녀의 상의 왼쪽 호주머니에 불쑥 집어넣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 느껴지는 순간, 문득 수업 시간에 다른 수강생이 우리에게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두 분은 정말 절친이세요?” 그때 우리는 웃으며 답했었다. “네, 그렇게 보이죠?” 내가 먼저 말했고, 동생은 “수업에서 만나고 따로 만나서 식사 한번 했어요”라며 덧붙였다. MBTI에서 ‘T’와 ‘F’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답변인 줄 금세 알 수 있었다.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깊은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예기치 않은 예술 작품이었다. 텅 빈 담벼락 한 모퉁이에 설치된 연탄재 위에 흰빛과 진한 분홍빛이 섞인 장미 한 송이가 굳건하게 피어 있는 풍경이 들어왔다. 낯선 광경이 신기해 나는 안 찍겠다고 했던 사진을 폰 카메라를 꺼내 찍었다. 삭막함 속에 피어난 생명의 강렬한 대비는 쉽게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누가, 어떤 의도로 만든 걸까?’ 순간적으로 다양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힘든 현실 속에서도 꿋꿋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발견의 순간, 호주머니 속에서 우리의 두 손은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용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내가 너를 붙잡고 이 차가운 바람 속에서 온기를 나눠도 될까?’라는 내 손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동생의 손은 묵묵히 ‘응’이라고 답했다. 잠시의 망설임 끝에, 우리는 서로의 손을 3분의 1 정도 겹쳐 잡고 찬 바람을 막으며 따뜻하게 돌담길을 걸어갔다. 늦은 밤, 타다 남은 연탄재 위에 핀 꽃처럼 강렬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시작되어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건네며 앞으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조용히 확신했다.
빌딩 숲의 번잡함에서 벗어났을 때 차분한 돌담길에는 매서운 꽃샘바람이 불어왔지만 시간이 지나자 담벼락에 찬 기운이 막혀서인지 마음의 오고감이 있어서인지 오히려 묘한 따스함으로 포근했다. 마치 그 연탄재 위의 꽃처럼, 늦은 밤 낯선 길에서 함께 걷는 그녀와의 만남은 예상치 못한 기쁨이었다. 어쩌면 각자의 삶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함께 발걸음을 맞추며, 서로에게 기대어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순간,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꽃을 피워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늦은 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우리는 은퇴 후의 시간을 건너기 위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아직은 먼 미래처럼 느껴지지만, 함께 무언가를 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공통된 바람이 맞닿았다. 마치 타다 남은 연탄재처럼, 우리의 남아있는 젊음과 열정의 기운도 언젠가는 빛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위에 핀 한 송이 장미꽃처럼, 우리는 은퇴 후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함께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희망을 얘기하고 있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고 즐거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의 이러한 고민은, 삭막한 연탄재 위에서 피어난 꽃이 주는 강렬한 메시지와 맞닿아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한 상황에서도, 희망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움틀 수 있다는 것. 우리 두 사람의 관계 역시, 어쩌면 각자의 인생에서 겪었던 힘든 시간들을 뒤로하고 새롭게 피어난 긍정적인 에너지인지도 모른다. 함께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은,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우리는 그 연탄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조용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