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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by 김주영
좌우의 대립, 보수와 진보의 갈등, 세대 간 생각의 충돌 등은 오늘날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남북의 대립 상황과 더불어 되풀이되고 때로는 더욱 악화되는 것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갈등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보고자 시작했던 문헌조사를 계속해오면서 구한말 조선시대, 일본 강점기 시절, 해방 후 혼돈 시절, 한국전쟁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들이 불과 반세기 만에 전개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또한 2차 대전 이후 생겨난 수많은 신생국들 중에서 경제발전을 이룩한 국가들은 많았지만 우리나라처럼 민주화도 성공한 경우는 많지가 않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특징도 우리 사회의 갈등에 영향을 미쳐오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문헌조사를 통해 얻게 된 이러한 개인적 깨달음을 소설을 통해 정리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시공간을 광범위하게 설정하기보다는 한국전쟁 동안 부산이 우리나라의 임시 수도였던 점과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시간들이 사상적 대립이 심했던 점을 고려하여 한국전쟁 전후의 부산이라는 시공간을 소설의 원형으로 설정을 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삶과 생각을 보여 주면서 그때 당시의 생각의 대립은 시간을 흘러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학생이었던 주인공이 어른으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거치는 가치관의 변화가 당시 시대 상황에 영향을 받았지만 본인의 삶을 선택해 나가게 됨을 보여 줌으로써 혼돈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우리나라에도 민주주의가 싹트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할아버지! 옛날에 사셨던 곳이 이 근처였어요? 이전에 부산에 사셨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중학교에 다니는 손자가 나를 바라다보며 물어보았다.

“이 동네는 아니야. 오늘 태종대 구경 갔다 왔지? 다리를 넘어 들어갔던 곳 말이다. 거기는 영도라는 곳인데, 그 섬 안에 있는 어느 동네에 살았지.”

집에 놀러 오면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할아버지 집에서 어서 빨리 떠나서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하는 손자가 나에게 오랜만에 호기심으로 말을 걸어오니 반갑기만 하였다.

“어머! 여기 책값이 이십 퍼센트 정도는 다른 서점보다 싼 것 같아요. 여보. 여기서 애들 참고서 좀 사가요.”

며느리가 아들에게 말을 건넨다. 아들 부부와 손주들이 어느 서점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초등학교 손녀는 자기가 사고 싶은 만화책을 발견하였는지 엄마에게 사달라고 온갖 떼를 쓰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길어지겠구나.’라고 생각이 들자 나는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의 다른 서점들을 이리저리 구경하기 시작했다.

팔십을 넘어선 나에게는 부산까지의 여행이 힘들었지만, 자식들이 모시고 떠난 오랜만의 가족여행이어서 그 의미가 깊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이전에는 헌책방 골목으로 알려졌었는데, 어느덧 부산의 관광지 중 하나로 자리 잡은 듯했다. 서점마다 천정까지 쌓여 잇는 중고서적들은 요즘처럼 대형서점이 대세인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지나다니는 인파를 헤치며 걸어가니 얼마 후 책방골목의 거의 끝머리에 당도한 것처럼 보였다. 다른 곳과는 달리 손님이 거의 없는 듯 보이는 한 서점이 눈에 띄었다.

古書店(고서점)이라는 상호가 적힌 간판과 함께 가게 입구에는 ‘고서적 사고 팝니다’라는 안내문이 적힌 플라스틱판이 달려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거기로 발을 옮겼으나 다른 가게보다 유달리 어둡고 오래된 책 냄새가 코를 자극하기 시작하는 고서점 입구에서 순간 멈추어 버렸다. 선뜩 들어가는 것이 주저되었지만 이내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바깥의 빛과 뚜렷이 구분되는 공간으로 들어왔다. 막상 안으로 들어와 보니, 천장의 전등 빛이 고서적의 탑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서 밖에서 볼 때 어두웠던 것이지 안에서 바라볼 때는 그 빛들이 오히려 은은한 효과를 주고 있었으며 책들의 나이들과 더해져 고즈넉한 맛을 더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서당에서 가르쳤을 것으로 보이는 한자로 된 교재들부터 구경하기 시작하여 천천히 시간을 따라서 올라오며 책들을 보았다. 다음 칸의 책들로 넘어오자 서점 한 칸에 위치한 철제 책상에 앉아 있는 주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냥 구경만 하고 나가는 손님들에 익숙해서인지 나에게 굳이 말을 걸지도 않은 채 시큰둥한 표정으로 두꺼운 안경을 통하여 갑자기 나타난 나를 일단 응시해 왔다. ‘여기는 주인이 손님을 평가하는 그런 분위기인 것 같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천천히 돌아서자 오십 년 대의 책들이 빼꼭히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약 천일동안 당시 이곳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고, 전국의 지성인, 문학가, 예술가 등이 모여 있었으므로 부산의 입장에서는 문화의 황금기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도 인쇄골목은 보수동에서 가까운 동광동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고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오십 년 대 책들은 그 당시에 이 부근에서 대부분 태어났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여기에 그 책도 있을까?’라고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며 오십 년 대 초반의 서적들을 이리저리 뒤져보기 시작하였다. 부산에서 발간된 현대문학, 대구에서 발간된 신태양과 같은 당시의 문학잡지를 발견하였지만 찾고 있는 책은 쉽사리 눈에 뜨지 않았다. 결국은 서점 사장에게 물어보자 그는 잠깐 기다려보라고 말한 뒤에 어디론가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한지에 쌓여 있는 얇은 책 한 권을 가지고 나왔다. 한지를 풀어 보니, ‘1953년 4월 창간호’라고 표지에 적혀 있는 누런 빛깔의 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3년 4월에 여기 부산에서 이 잡지의 창간호가 나오기까지의 시간들, 그리고 그 분과의 짧았던 만남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잔잔히 회상해 보았다. 내 나이만큼이나 이제는 오래된 시간들이어서 그 기억의 영상들의 빛은 뿌옇게 바래져 있었다. 눈이 자연스럽게 감기며 빛바랜 사진처럼 아련한 추억 속의 시간들이 머리를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초저녁부터 봄비처럼 부슬부슬 내리던 눈이 어느새 앞마당을 하얗게 채워 놓은 밤이었다. 희미한 호롱불 옆에서 어머니는 나의 옷과 책들을 큰 가방과 보따리 속에 차곡차곡 담고 계셨다. 뭔가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이내 가슴속으로 삼켜 버리고 어머니의 옆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었다.

“환용아! 부산으로 가면 여기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어르신들한테는 깍듯이 잘해라. 너희 아버지가 무뚝뚝하긴 해도 속정이 깊으신 분이다.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새로 가는 학교에서도 공부 열심히 해라."

“네. 어머니. 제가 부산으로 가더라도 자주 찾아뵈러 오겠습니다.”

“아니다. 너는 여기를 떠나면 될 수 있는 대로 이곳을 잊도록 해라. 그것이 너에게 도움이 될 거다. 엄마는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을 테니, 걱정 하나도 말거라.”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부산의 집으로 들어가면 어쩌면 이곳을 다시 못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본 부인이 아닌 첩이었고, 나는 첩의 소생으로 십 대 중반까지 어머니와 진주에서 같이 살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얼굴은 어렸을 때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본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나의 배다른 형이었다. 형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중일전쟁 말기에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해방되던 해에 중국 남경에서 전사를 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형이 죽은 몇 년 후에 나는 경남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형의 죽음을 이제는 받아들이시고는 나를 부산 영도의 본가로 불러들여 앞으로 같이 살도록 결정을 내리신 것이었다.

까치가 아침부터 시끄럽게 지져대었지만 찾아온 손님은 부산에서 나를 태우러 온 아버지 회사의 시커먼 트럭이었다. 진주까지 물건을 실어주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겸사겸사 나를 태우고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집에서 가방과 보따리를 들고 걸어 나왔고 어머니는 대문까지만 따라 나오셔서는 먼발치에서 내 뒷모습을 바라다보고 계셨다. 트럭에 올라타기 전에 어머니가 서 계신 쪽으로 돌아다보자, 어머니는 손짓으로 어서 올라타라고 하셨다. 운전석 옆에 올라타자 트럭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운전기사가 담배를 천천히 끄더니 차에 올라와서 잠시 후에는 무심한 얼굴로 차를 몰기 시작하였다. 나는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점점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과 아련한 고향의 정경을 마지막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지만 트럭이 저 멀리 사라져 가자 어머니는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훔치고 계시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트럭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꾹 참고 다시 얼굴을 차 안으로 돌렸다.

"도련님. 부산 본가로 가시는 건 처음 이지예?"

트럭이 출발한 지 한참 만에 둘 사이의 적막을 깨며 운전기사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 네. 솔직히 아직 부산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진주에서는 얼마나 걸리는지요?"

"도착하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한숨 주무시소. 제가 깨워 드리게요."

"아닙니다. 혼자 운전하시려면 힘들 실 텐데."

하지만, 당시 십 대 중반이었던 나이였던지라 졸음은 오래되지 않아 몰려왔고, 이리저리 몸이 흔들리는데도 잠은 계속 왔다. 한나절 가득히 차가 달렸던 걸로 생각이 들었고, 오후 늦은 시간에 그는 나를 깨웠다.

"도련님. 부산으로 들어왔었예. 저기 바다 건너 보이는 섬이 영도입니다. 피곤하실 텐데, 차에서 내려 여기서 숨 좀 쉬고 영도 들어 가입 시데이."

나는 잠에서 급하게 깨어나 눈을 비비며 차문을 열고 땅에 발을 디뎠다. 차에서 내린 곳은 부산의 송도 앞바다였다. 저기 보이는 곳이 영도라고 하였는데,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공기들이 섬의 산 능성을 타고 올라오며 서서히 구름으로 변하고, 그 구름은 산꼭대기를 넘어 다시 내륙 방향의 바다로 급하게 내려가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장관이었다. 잠에서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나를 정신이 갑자기 바짝 들도록 만들 수 있는 광경이었다.


부산의 본가에 도착하자 큰 일본식 가옥이 눈에 띄었다. 일제강점기에 영도에 살았던 일본인 유지의 집이었을 곳으로 생각이 들었다. 방의 구조는 한옥으로 이후 개조한 것으로 보였다. 먼저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구한말에 진사를 지냈다고 들어서인지 한자 병풍을 뒤로하신 채 조선시대 한학자의 모습처럼 근엄하게 나의 절을 받으셨다. 첩의 소생인 나를 집에 받아들이는 것이 탐탁하지 않으신 표정이셨다.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시절 진주에서 뵙던 얼굴보다는 이제는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이셨다.

"환용아! 너희 어머니가 그래도 혼자서 널 잘 키운 모양이구나. 진주에서 중학교 다니면서 여기 부산에 있는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지금부터는 이곳 식구라고 생각하고 살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데, 열심히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뵈었던 아버지의 본 부인께서는 방의 뒤쪽에 앉아서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계셨다. 머리를 단정히 하고 계신 그분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지만 나에게 적대적인 눈빛은 보여주지 않으시고 나중에 조용히 저녁을 차려 주셨다. 사업일로 바쁜 아버지를 말없이 내조해주시는 유형의 부인이시라는 것을 나중에 살면서 알 수 있었다.


영도 본가는 아버지의 친척들이 신세를 지며 같이 살고 있어서 외관상으로는 대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고향에서 이곳 부산으로 혼자 오셔서 자수성가를 하셨고 이후 친척들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부산에 많이 정착하게 되었다. 친척들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일자리를 구하고 본가에 신세를 지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로 갑자기 나타나게 된 나는 그들에게는 시기의 대상이 충분히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첩의 소생 출신이라는 점은 내가 뿌리가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입방아에 많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런저런 배경 속에서 나는 힘들게 부산생활을 시작하여야 했던 것이었다.


친척 중에서 특이했던 분은 해방 후에 일본에서 건너온 오촌 당숙이었다. 일본 교토에서 세탁소를 하며 제법 돈을 모으셨는데, 해방이 되며 부인인 작은 어머니가 한국으로 너무 돌아가고 싶어 하여 귀국선을 타고 부산으로 오셨다고 하였다. 부산에 와서는 식당을 크게 하다가 사기를 당하여 일본에서 들고 온 재산을 모두 잃게 되셨다. 이후로는 당숙은 밤마다 술을 마시게 되었고, 자주 하시는 말씀은 "이곳 조선은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라는 것이었다. 친척 중에서 오직 당숙만은 나에게 호의적이셨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당숙과 얘기를 나눌 때가 제일 마음이 편하였다.


"환용아! 내가 교토에 살 때만 해도 말이다. 조선인들 중에서는 제일 잘 살았단 말이야. 그게 해방 후에 저 여편네가 하도 조선에 가고 싶다고 해서 오게 되었지. 근데, 여기 조선은 뭐가 뭔지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아직 제대로 사회가 돌아가는 것이 없어. 온갖 사기꾼들만 넘쳐나. 다시 일본으로 가고 싶구나.

"다시 잘 사실 날이 오실 겁니다. 그래도 해방이 된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조선인들은 아직 혼자서 뭐 하지를 못해. 그래도 일본인이 우리와 같이 있을 때는 사회가 제대로 돌아갔지 말이야."

당숙을 좋아 하진 했지만 이런 말씀을 할 때면 나는 한숨이 푹 쉬어지며 생각의 차이를 쉽게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아버지께 당숙은 '이제 정신 차리고 다시 뭔가를 해야지.'라는 잔소리를 자주 들었지만 아버지가 구해준 일자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여 그만두어 버리곤 하였다.


그리고 나를 진주에서 부산까지 태워 준 트럭기사의 아버지는 박 서방이라는 분인데, 나의 할아버지 세대부터 집에서 같이 살며 온갖 집안일을 거들어 주시는 분이었다. 영남지방 유림의 전통을 여전히 따르고 계시는 할아버지와 더불어 박 서방은 조선시대의 봉건적 틀을 그대로 유지시켜 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계셨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 다른 친척들은 아버지의 회사 일을 거들며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기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계셨다. 이렇듯이 당시 영도의 본가에는 구한말의 봉건적 틀을 가지고 계셨던 할아버지와 박 서방, 일제강점기를 그리워하며 해방 후의 한반도에서 혼돈스럽게 새로 그려지고 있는 질서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당숙, 이러한 해방 후의 혼돈 속에서 생존을 위하여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친척들로 우리나라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육촌 형들 중 한 명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정부 수립 이후 북한으로 건너가 버렸다고 들었는데, 모두들 쉬쉬하며 공개적으로 얘기하기를 꺼렸고 아버지도 그 식구들은 집안에 들어오게 하시지를 않으셨다고 들었다. 당시 영도 본가는 해방 후의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온갖 사상적 혼돈을 보여주었던 작은 공간이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전반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아버지의 경제적인 기반 덕분에 나는 금전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부산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답은 학생으로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길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입학하여 다니게 된 경남고등학교는 진주에서의 중학교 시절과는 다르게 머리가 좋은 학생들이 아주 많았다. 그들과 경쟁하는 것이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학교 과정을 모두 따라 나갔다. 덕택에 첫 학년의 두 번째 학기가 되자 성적은 최 상위권에 들어가는 성과를 보여줄 수가 있었다. 집안의 모든 식구들도 이제는 나를 더 이상 업신여기지도 않게 되었고, 향후 정부 고위 관료가 될 사람이라고 나를 추켜세우기도 하였다. 나도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가며 부산에서의 첫해가 지나가게 되었다.


부산에 정착하게 된 다음 해의 여름이 시작되던 즈음인 어느 날에 학교에서 반 친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옆에 앉은 친구 한 명에게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왜 갑자기 시끄러워졌지."

"야. 오늘 아침에 북쪽에서 남으로 쳐들어 왔대."

"그러면, 전쟁이 난 거야?"

"그렇지. 우리 국군이 물리치고 있어. 이승만 대통령께서도 절대로 서울까지는 못 들어오게 할 거라고 하시니까, 멀지 않아 북쪽에서 되돌아가겠지. 올해 초부터 삼팔선에서 조금씩 충돌이 있긴 했나 봐. 아마 조금 싸움이 커진 거 같지만, 다시 안정되겠지. 뭐."

하지만, 전쟁의 전세는 초반부터 남쪽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며칠 뒤 서울이 점령당하였고, 자꾸 국군의 방어선이 뒤로 내려오는 소리들이었다. 어느새 대전도 넘어가게 되었고, 낙동강을 따라 대구와 부산을 방어하며 최후의 진을 치는 전세로 들어서게 되자, 거리와 학교의 벽에는 학도병으로 지원하자는 문구가 나붙게 되었다.


"아버지. 전쟁이 난 이후로 북에서 너무 빨리 남으로 밀고 내려온 것 같습니다. 낙동강 전선도 무너지면 여기 부산도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학도병 모집하는 곳에 잠깐 갔다 왔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날 나는 아버지가 방에서 혼자 계시는 것을 보고 인사를 드리고 안으로 들어와 공손히 말씀을 올렸다.

"그래. 나도 소식을 계속 듣고 있다. 미군들이 더 들어오기 전까지는 최대한 버텨야 부산까지는 저들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을 텐데 말이다. 여기 부산이 점령당하면 모든 게 끝나지."

"그래서 이번에 학도병으로 자원해 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지고 모든 게 끝나면 제가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일제강점기에 학병으로 끌려간 큰아들이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으니, 그나마 마지막 남은 아들까지 학도병으로 전쟁터로 간다니 마음이 편치 않으셨을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상황은 너무 급박하게 악화되어 앞날을 알 수 없었고, 아버지가 그동안 이룩한 모든 것들도 전쟁의 결과에 따라 한순간 거품으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한 달 후 내가 배치받은 곳은 전투가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과 같은 현장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둘째 아들까지 잃고 싶지 않으셔서 아버지는 사업으로 아는 인맥을 통하여 미리 손을 써 놓으셨다. 미군의 통역 지원병으로 최전선과는 떨어져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나는 미군을 따라 동해안으로 배를 타고 올라가서 함경남도 원산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보았던 원산 앞바다의 고운 모래사장은 지금까지도 눈에 선할 정도로 생생하였다. 잡혀온 북한군 포로들을 심문할 때 통역으로 내가 종종 참석하였는데, 당시 받았던 인상은 그들도 평범한 내 또래의 친구들 같다는 것이었다. 이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전쟁이라는 현장에 끌려온 이들이었다. 반면에 북한군 장교들을 상대할 때는 그들이 사상적으로 무장이 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미군 정보국 장교들에게 넘겨주었고 정보의 진위 여부를 분석하고 채택하는 일은 그들의 몫이었다.


간혹 전투현장까지 근접하여 지원하러 가서 본 광경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하며 배운 모든 것들을 완전히 백지로 돌려놓았다. 팔다리가 잘려 나간 채 뒹굴고 있는 양측 군인들의 시신들, 고통을 호소하며 전장의 흙더미 속을 기어 다니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군인들, 전쟁과는 무관하게 살다가 희생당한 일반인들의 시체들과 그 옆에서 울고 있는 가족들은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고 한동안은 내 뇌리 속에 남은 그 잔혹한 영상들로 정신적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전쟁에서 어떻게든 이겨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모두를 참혹하게 만드는 전쟁은 두 번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는 마음이 또한 들었다.

얼마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북한 땅의 주둔지로부터 철수하게 되었고, 중부전선의 후방지역으로 배치받은 나는 어느 날 미군들과 함께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내가 탔던 트럭이 지레를 건드리게 되자 폭발음과 함께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였다. 차 안에 동승하였던 미군들 몇 명은 바로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나는 다리에 골절상을 입고 후방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병원에서 몇 달을 보내었지만 사고로 인하여 다리를 약간 절게 되는 후유증이 생겨 버렸다. 이를 들은 아버지는 위에 손을 써서 나를 군대에서 나오게 하였다. 학도병으로 지원한 이후 내가 보고 겪으면서 생기게 된 육체적, 정신적 상처들로 인하여 나도 또한 군에서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 때였다.


전쟁이 발발한 지 거의 일 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된 나는 그전에 익숙했었던 모든 것이 이제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집안의 식구들과 친척들은 모두 나에게 그동안 고생하였다고 말을 걸어 주었지만, 그들은 한국전쟁 이후에 또다시 바뀐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부산항을 통해 대량의 지원물자가 들어오고 있었고, 피난민들로 인하여 부산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 상태였다. 부산은 산이 많은 도시였는데, 산들의 중턱까지 피난민들의 임시 거주지들은 가득히 올라가 있었고 피난민들은 하루하루를 연명하여 그날의 생존을 위해 일자리와 먹을거리를 하루 종일 찾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집에서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고 나는 휴학을 하였던 경남고등학교로 다시 찾아갔다. 같이 반에서 공부를 하였던 급우들은 삼 학년이 되어 있었고 부산에 내려온 전시 대학을 가기 위해 마지막 학기의 공부에 한창이었다. 나를 보자 모두들 반가워했지만, 이내 조금 전까지 보던 책장을 다시 펼치며 공부를 시작하였다. 순간 나는 분노가 속에서 치밀었고, 조용한 교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안으로 삼켜 버렸다. 유독 나만 지원하여 간 학도병으로 보낸 일 년간의 시간들이었고, 나의 급우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인생을 위하여 그 시간들을 투자하였다고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그 황금 같았던 일 년을 따라잡기 위해 복학을 하여 부지런히 공부를 따라가야만 했다.


1952년의 부산에서는 정치적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당시 부산에 자리 잡은 전시 정부는 의회를 무시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헌법 개정을 강행하여 이승만의 재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었다. 한국전쟁 초기에 서울 사수를 외치다가 서울시민들을 버리고 먼저 남하해 버린 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은 일 등으로 인해 국민의 원성이 높았고 의회에서는 대통령의 재집권을 반대하였지만 정치깡패들을 동원하고 국가의 위기의식을 강조하여 선거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은 재집권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일 년 동안의 학도병 시절을 통해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진 상태였으므로 부산에서 벌어지는 이런 부조리한 모습들이 쉽사리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지만 당시 나에게는 어떻게든 공부를 따라가서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런 나의 모습을 알아차린 듯이 아버지는 나를 여름에는 조용한 절로 보내어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만들어 버리셨다. 시간이 지나고 그해에 나는 전시 대학의 법학과에 합격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953년에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몇 달이 남게 되자 아버지는 내가 이런저런 방황을 하지 않도록 사업적으로 아시는 분의 회사에서 임시로 일을 하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셨고, 몇 달 동안 나는 거기로 일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


그날도 아미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영도로 들어가며 영도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하늘은 산비탈까지 가파르게 올라서 있는 피난민 촌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일은 할 만하나? 니는 그래도 글 좀 배웠으니 잘할 거다.”라고 창근이가 말했다.

두 달 즈음 전부터 임시직원으로 다니기 시작한 출판사에서 나는 자료 정리와 원고 교정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고향 친구 창근이는 조판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고향의 논, 밭, 시냇가를 뛰어다니며 놀던 우리는 각자 어느 때부터인가 이곳 부산으로 들어와 있었다.

“너, 오늘 우리 집 가서 저녁 먹고 가라. 청학동까지 들어가려면 배고플 터인데”

창근이는 내키지 않는 듯이, “아니다. 날도 춥고, 내 일찍 집에 가서 좀 쉬련다. 내일부터 밤늦게까지 조판일 할 게 많아졌다. 사장님이 누굴 데려 오셨던데, 다음 달까지 그 사람 잡지를 시내 책방에 배본해야 한다네. 니도 누군지 알 거다.”라고 대답했다.

“아. 장 선생이라고 하더라. 사장님이 많이 신경 써주시는 것 같다. 낮에는 책상에 앉아서 원고 교정 보던데. 우리 사무실에 책상이 많이 없어서, 외근 나간 기자 선생들 책상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일하더라. 무슨 잡지 내는지는 모르겠다. 니는 아나?”라고 나는 말했다.

“사상계라고 하던데. 나도 내일부턴 그쪽 조판을 도와야만 된다.”라고 창근이는 투덜댔다.

어느덧 영선동과 청학동이 갈리는 지점까지 우리는 걸어왔고, 내일 만나자며 헤어졌다.

아버지와 마주 보고 하는 저녁식사는 자주 있진 않지만 편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저녁 드시지요.”

“그래. 니는 이사장 회사에서 잘하고 있나? 거기가 리더스 다이제스트 뭔가 하는 미국 유명 잡지를 한국에서 출판하고 있는 곳이다. 많이 배울 거다. 조금만 일하다 그만두고 법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근데, 요즘은 거기서 뭐 듣는 얘기는 없나?”

“네. 아버지. 요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몇 주 전부터 장준하 선생이라는 사람이 저희 사무실에 와 있는데, 사장님 도움으로 다음 달에 새로운 잡지를 내려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장준하? 처음 듣는 이름인데. 잡지 사업이 쉽지가 않을 거야. 요즘 같은 세상에는 누가 위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사업하기 힘들다.”

“사무실에서 기자 선생들끼리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출판사 오시기 직전에는 문교부장관이었던 백낙준 박사 밑에서 일했고, 일제 때 학병으로 만주에 갔다가 이후 탈출하여 해방 후에 김구 선생님 일행과 같이 귀국했다고 합니다.”

“그런 인맥이면, 이 혼란한 시대에 한몫 잡아야지. 뭔 놈의 잡지를 만들겠다고 그래? 제정신이 아니야. 쯧쯧. 이박사가 작년에 대통령 재선 되었으니, 생각이 있다면 그쪽 인맥과 계속 줄을 닿는 것이 중요하지. 니는 딴생각 말고 법 공부나 열심히 해라. 나중에 수도가 서울로 환도하면 지금 내가 어렵게 알아 놓은 사람들이 너한테도 다 도움 될 거다.”


동란 초기 학도병으로 자원하여 보내다 온 시간들과 작년에 부산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정치파동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 나였지만, 고민을 아버지와 나눌 수가 없었고 항상 속에서만 맴돌았다. 오늘도 조그만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

며칠이 흘렀다. 일찍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나는 창근이에게 “일 마치고 저녁에 PX 거리나 구경 가자.”라고 했다. 그러자, 창근이는 “일이 계속 밀려서 오늘도 남아 일해야 돼. 사장님도 새로 나올 잡지의 조판이 언제 되는지 물어보시고, 장 선생도 요즘 우리와 매일 저녁에 남아서 일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럼. 사무실에 남아서 잔일 좀 하고 있을 테니. 같이 영도 들어가자.”라고 나는 말했다.

저녁 아홉 시 반이 넘어 가자, 창근이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장 선생이 우리 조판공들과 같이 근처 대폿집에서 지금 나가서 한잔 하자고 하는데, 너도 같이 가자. 너도 매일 보고 지내잖아. 어서 챙겨라.”


같이 들어간 대폿집은 영도다리 근처 골목 안에 있었고 벽에 써 붙여 놓은 안주 이름이 맞춤법에 틀리게 적혀 있는 허름한 곳이었다. 하지만, 삼십 대 중반의 둥글둥글한 얼굴의 주인아주머니는 꽤나 정감 어리게 우리를 맞이하였다.

“어서 오이소! 오늘도 늦게 일했나 보네. 쭉 대포 한잔 하이소.”

대폿잔이 돌아가며, 조판공들의 목소리는 높아만 가고 오늘 하루 쌓인 피로를 여기서 다 푸는 듯했다. 그중 한 명이 “장 선생님. 매일 우리하고 조판일 하시더니, 이젠 조판공 다 된 것 같심더. 하하하”라고 하였다.

“아닙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진행이 잘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 한잔들 쭉 드세요.”라고 장 선생은 대답하고 몇 마디를 더 나누더니,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사무실에서 매일 보기는 했는데, 내가 정신이 없어서, 오늘 이렇게 처음 제대로 말을 걸어보는 것 같네. 김 군이라고 했던가?”

“네. 실은 평소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워낙 바쁘셔서 제가 말씀을 건네기도 힘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나는 장 선생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했다.

“선생님은 높은 분들을 많이 아신다고 들었는데, 왜 이리 고생하며 잡지를 내려고 하십니까?”

“허허. 책 만드는 게 나하고 맞는 것 같아.”라고 장 선생은 쑥스러운 듯 웃다가 다소 진지해지며 말했다.

“음.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이 사상적으로 많이 방황하고 있어. 특히, 전쟁 이후로는 더 그렇지. 또,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해방 후에 미국으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주어지게 되었는데, 그걸 우리가 운영하려면 일반 국민이 제대로 알아야 해. 때로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지.”

“그러면, 선생님께서 내려고 하는 잡지는 요즘 시국에서는 편집 방향을 잘 잡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괜히 이 박사 정권에 관한 글을 잘못 올리셨다간 봉변을 당하실 수도 있을까 염려됩니다.”라고 나는 장 선생 눈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편히 살 수도 있었고, 지금도 나 하나 마음만 먹으면 안락하게 살 수도 있을 거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또 그럴 것이라네. 김 군!”

이 말에 내 맘 한 구석에서 희미하게 광명이 떠오르며, 나의 고민을 풀 실마리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도 다리를 건너 창근이와 영도로 들어갔다. 집안 입구에 매어 놓은 개가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컹컹'하고 짖어 대었지만, 집안 식구인 나를 보자 이내 반가운 듯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겼다. 술기운에 얼굴을 비비며 한참을 쓰다듬어 주다가 방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이불을 펴고 불을 끈 후 자리에 누웠지만 술기운 때문이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직까지 내 인생의 방향을 잡아 준 사람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리움에 마음이 복 바쳐 왔다. 하지만 지금의 나의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머니조차도 길을 제시해 주실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앞만 바라보고 가던 나는 뭔가 말로 하기 힘든 마음의 방황을 겪고 있었던 것이었다. 갑자기 창근이가 떠올랐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어렸을 때부터 묵묵히 돈을 벌며 살아가고 있는 그에 비하여 사실 내 인생은 아버지 덕택에 어려움을 모르고 지내온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만 옳게 살 수 있을까?'라는 번민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루하루를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사치스러운 생각일 것 수도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전개될 인생에서 선택을 하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장 선생과 우연히 함께 한 자리에서 나눈 길지 않은 대화였지만, 부산으로 들어온 이후, 그리고 정확히는 이 전쟁 이후 내가 보고 들으면서 생긴 나만의 마음의 방황 속에서 길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답답한 마음에 방문을 열고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의 기운이 서서히 가시기 시작하는지, 동쪽의 하늘이 엷은 푸른색을 띄우기 시작하였고, 하늘 천정과 땅의 가운데 정도에 자리 잡은 별 하나가 유달리 밝게 나를 비쳐 주었다. 그 별빛을 한참 쬐다가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출판사 사장님에게 요청하여 장 선생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사장님도 그쪽 일이 급하긴 하니 시간 내어서 많이 거들어 드리라고 하셨다.

"장 선생님. 사장님께서 선생님 일을 오늘부터 도와드려도 된다고 하셨어요. 뭐 도와드릴 일이 있으세요?"

"이 사장님께 여기에서 신세를 지내는 것도 고마운데, 김 군까지 도와준다면 정말 고맙긴 한데, 이거 여간 내가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니오. 제가 여기 출판사 일도 같이 해드리면서 하는걸요. 창간호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사장님도 도와드리라고 저에게 허락하셨어요."

"음. 그러면 내가 김 군에게도 좀 신세를 져야겠군. 아무튼 고맙네. 창간호의 원고는 이미 받아서 조판 작업을 거치고 있으니까. 창간호 나오기 전까지는 다음 호의 원고를 내가 받아 오고 있어. 미리 원고 받아서 교정도 봐야 되거든. 그러니까, 내가 받아 온 원고의 교정을 좀 거들어 주게."

"알겠습니다. 이게 다음 호에 실릴 원고군요. 이 원고부터 교정 작업을 하면 되겠네요."


장 선생은 하루 종일 분주하셨다. 낮에는 시내 다방에서 아는 교수들을 만나서 원고 부탁을 하거나 이미 부탁한 원고를 받아오는 일을 하셨고, 오후에는 사무실에 돌아오셔서 창간호의 조판 작업에 최대한 참여하셨다. 장 선생의 사모님도 자주 사무실로 오셔서 선생님의 일을 도와주시곤 하셨다. 장 선생이 가져온 원고를 읽어보니 이해하기가 쉬운 글들은 아니었다. 정치, 문화, 사상, 경제, 역사 등의 여러 분야의 우리나라 석학들의 글을 접하게 되었고, 몇 달 후 내가 입학할 대학의 교수님들도 친필의 원고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먼저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번 글을 읽어 뜻을 이해하고 나서야 교정 작업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장 선생과 사모님은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시던 까닭에 살림살이가 넉넉하지가 못하였다. 하지만, 이런 궁핍한 생활 속에서 무엇이 저분들을 이렇게 책 만드는 일에 몰두할게 만들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찾기보다는 장 선생의 일을 도와 드리면서 나도 또한 잡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있게 되었다. 내가 교정 작업을 마친 원고들은 장 선생이 그 바쁘신 와중에도 다시 꼼꼼히 재 교정 작업을 진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창간호에 실린 원고의 글자가 인쇄되도록 그 글자의 활자를 찾아 순서대로 배열하는 조판 작업은 대단히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는 것을 나는 어깨너머로 보며 알 수 있었다. 창근이와 조판공들은 막바지가 되어 가자 야근이 일상화되어 갔지만, 그 야근의 현장에는 언제나 장 선생이 조판공들과 같이 섞여서 같이 일하고 계셨다. 창간호가 나오는 날짜가 가까워 가자 나도 또한 마음이 설레어 갔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문제들이 나타나며 새 잡지의 창간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교수들의 원고료, 종이 값, 조판료 등은 향후 잡지가 시중 서점에 배포되어 회수될 돈에서 변제가 될 예정이었으나, 마지막 작업인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동판 값은 외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동판 값은 작은 돈이 아니었으므로 출판사의 이사장님도 장 선생을 도와주는데 한계가 있었다. 장 선생은 이리저리 아는 분들을 찾으러 다니며 돈을 구하러 다녔지만 해결하기 쉽지가 않아 보였다.


나는 이런 어려움을 보자, 아버지에게 한번 부탁을 드려 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일찍 들어오신 아버지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님. 요즈음 제가 이사장님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핑계로 자주 인사도 못 드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드릴 말씀이 있기도 해서 왔습니다."

"그래. 나도 요즈음 바빠서 너하고 얘기할 시간이 많이 없었구나. 하고 싶은 얘기는 뭐고?"

"일전에 말씀드렸던 장 선생 기억나시는지요?"

"그래. 잡지 낸다고 하던 그 사람 말이지? 생각난다."

"아버님. 실은 제가 현재 이사장님 출판사에서 그분 잡지를 좀 도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간호 막판 작업에서 동판 값 때문에 장 선생이 지금 난관에 부딪힌 모양입니다. 혹시 아버지가 좀 도와주시면 어떠실지 싶어 의향을 여쭙고자 이렇게 말씀을 드려 봅니다. 향후 시중 서점에서 책값이 회수되면 아버지께서 다시 받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 나는 사업하는 사람이어서 투자할 만한 사람과 일에만 돈을 써야 한다. 안 그러면 망하기 쉽고, 나한테 의지하고 있는 식구들과 직원들 모두 하루아침에 쪽박을 차게 돼. 현실은 냉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장 선생의 잡지에 실릴 원고들을 교정도 제가 보고 있는데, 제 생각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잡지가 될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계도적인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민주주의? 내가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만, 백성이 직접 지도자를 뽑고 백성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고 그런 걸로 들었다. 근데, 말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거 하려면 한창 멀었다. 어쩌면 우리 조선 사람들 본성과 안 맞을 수도 있어. 임금이 나라를 직접 다스리거나 이승만 박사와 같은 양반이 오랫동안 정치를 하더라도 백성만 배불리 먹고살도록 만들면 되는 거야. 너는 배고픔이라는 것을 모를 거야. 너희 할아버지가 유림으로 살아오셨어도 실제로는 넉넉하지 못했어. 내가 고향에서 젊은 나이에 이곳 부산까지 오게 된 것도 한번 배불리 먹고 잘 살아 보고 싶어 온 거다."

"아버님. 장 선생의 잡지는 제가 보기에는 앞으로 우리나라 사람들 살아가는데 방향을 잡아 줄 것으로 감히 생각이 듭니다.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우리에게 뿌리내리기는 쉽지 않을 테지만 언제가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환용아! 이 아버지 말을 잘 들어라. 지금 우리나라는 혼돈 그 자체야. 너희 당숙이 평소 하던 말처럼 엉망진창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것은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에서 하는 사치일 뿐이야. 너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꽃이 필 수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무튼, 오늘 말한 것은 도와줄 수가 없다. 너도 앞으로는 그 장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과 그만 어울리고 다음 달부터는 이사장 회사 그만두고 대학에 입학할 준비나 해라."

나는 힘없이 방을 나왔다. ‘쓰레기에서 꽃이 필수 있겠냐?’라는 아버지의 물음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장 선생에게는 내가 아버지에게 동판 값을 부탁드려 보았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옆에서 돈을 구하러 다니는 선생의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봐야만 했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문제는 해결되었는데, 장 선생 사모님이 피난 오실 때 가지고 왔던 겨울옷들을 팔아서 어렵게 돈을 마련하셨다고 듣게 되었다.


이후 나는 이사장님의 출판사를 그만두고 대학에 입학할 준비를 시작하였지만,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않고 장 선생을 찾아가 일을 도와 드렸다. 장 선생이 어렵게 도강증을 받아서 서울까지 올라가 공보처의 출간 허가 번호를 받은 후에는 인쇄된 잡지에 일일이 고무인을 찍고 출간 번호를 적는 수작업을 도와 드릴 수가 있었다. 드디어 모든 출간 작업이 마치게 되었다. 하지만, 창간호를 실제 배포하기로 예상했던 날짜가 공보처의 출간 허가로 인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창간호를 시중 서점에 배포해야만 했다. 장 선생과 사모님이 직접 리어카를 끌고 서점으로 잡지들을 배포하시는 것을 본 이후는 마음이 너무 안쓰러워 나도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일을 거들었다. 책방에 책이 배부되어 진열대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기뻤고 사상계라는 이 새로운 잡지는 지식에 목말라 있었던 학생들과 지성인들에게 많이 팔려 나가고 있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한 서점에서 잡지의 배포 요청이 더 들어와서 장 선생과 같이 리어카를 끌고 시내 중심가를 지나고 있었는데, 고급 승용차에서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내리며 장 선생과 마주치게 되었다. 둘은 순간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그 신사는 이내 무시한 채 건물 안으로 재빠르게 들어가 버렸다. 장 선생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목에 걸친 수건으로 닦더니 다시 리어카를 끌기 시작하였다.

“장 선생님. 아까 마주쳤던 분과 아시는 사이세요?”

“아. 그 모던 보이? 한 때는 가까이 일을 한 적이 있었지. 정부 수립 이후 나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시 신학교로 갔었는데 그 친구는 계속 남아서 지금은 이 박사 밑에서 제법 잘 지내는 모양인 것 같아.”

잠깐 씁쓸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갔지만, 다시 무서울 정도로 자신의 현실로 돌아와서 사상계의 다음 호에 대한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뒤 사상계는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매월 출판이 되었고 여러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퍼져나가 책이 많이 팔리게 되어 점차 안정되어 나갔다. 나는 다시 학업에 전념하여야 했으므로 장 선생을 거의 보지는 못했다. 그 해 시월이 되자 수도가 다시 서울로 환도하면서 장 선생과 식구들은 모두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이후 들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사상계는 오십 년 대 중반부터는 우리나라의 주요 언론지로서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었고, 4.19 혁명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학업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였었다.



“아버님. 여기 계셨군요. 어디 가셨는지 몰라서 한참을 찾으러 다녔어요.”

고서점에서 사상계 창간호를 들고 회상에 잠겼던 나는 아들의 말에 급하게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책방 사장에게 들고 있던 누런 빛깔의 잡지에 대한 가격을 지불하고 다시 한지에 포장하여 가지고 나왔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역에 도착하자 태극기를 든 노인들이 집회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만큼 늙어버린 노인네들도 섞여 있었다.

“할아버지도 저 사람들처럼 태극기 부대예요?”대학생인 손녀가 물어보았다.

“이 할아버지도 그랬다면 저기 어딘가 같이 서 있었겠지.”

“태극기 부대 노인들은 왜 저러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한다니까요. 정말 화가 나요.”

“그건 말이다. 음.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서 그렇단다. 저 사람들도 지금까지 살면서 저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가 다 있을 거야.

“그러면, 할아버지는 저분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시게 된 이유가 있으시겠네요?”

손녀의 마지막 질문에 나는 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오늘 부산에서 우연히 사게 된 이 오래된 잡지와 그리고 장 선생과의 만남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 전개되었던 나의 삶은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선택한 인생을 후회한 적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대학을 나온 이후 정부 관료를 시작했고 4.19 이후는 장면 내각에서 일했지만 군사혁명정부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여 결국 옷을 벗게 되었다. 하지만, 장 선생과의 만남 이후에 내렸던 나의 선택은 나로 하여금 무엇인가 방향이 있는 일관된 삶을 살게 해왔다고 말할 수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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