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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에서 처음 만난 플라멩코

나 홀로 여행의 시작

by 김주영

오후 1시 25분에 코르도바에서 출발한 기차는 도착예정시간인 오후 3시 5분을 조금 넘겨서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중간에 어느 역에서 한국인 아가씨 두 명이 타던데, 큰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봐서는 여행 중인 듯했다. 몇 시간 전에 헤어진 딸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라나다는 알람브라 궁전이라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관광지가 있기 때문에, 스페인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도시이다. 그래서 코르도바에 비해서는 한국인 여행자들의 모습이 종종 보였다.


스페인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따레가(Francisco Tárrega, 1852~1909)가 작곡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Recuerdos del Alhambra)으로 이 도시는 더 알려지게 된 것 같다. 클래식기타가 가지는 청명한 소리에 잘 어울리는 곡이며, '뜨레믈로'라는 고급 수준의 연주법 때문에 음악을 들으면 몽환적인 느낌에 빠져 든다. 클래식기타를 배우는 나로서도 언젠가는 연주해 보고 싶은 명곡이다.


그라나다 기차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이동하여 호텔에 도착하였다. 도심과도 가깝고 시설도 괜찮아 가성비가 좋았다. 그라나다는 다행히 코르도바와 비교하면 덜 더웠다. 코르도바가 최고 43도였는데, 그라나다는 최고 32도 정도였다. 대신에 햇살의 강렬함은 두 도시가 마찬가지였다. 늦은 오후에 호텔 방안에 들어오니, 피곤이 몰려왔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하지만 1시간도 채 누워 있지 못하고 배고픔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종일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호텔 직원이 가르쳐 준 레스토랑 밀집지역으로 15분 정도 걸어갔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식당, 카페들이 문을 닫고 그 이후에 다시 여는 곳이 많기 때문에, 나는 그나마 문을 연 가게들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웨이터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 준 레스토랑의 노천 테이블에 앉았다. 맥주 한 병을 시키면 안주 같은 타파스 한 접시가 공짜로 나왔다. 출국하기 삼 일 전에 치루 수술을 받고 온 터라서 술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엄청난 갈증을 단순히 물이나 콜라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아서 수술 후 6일째 되는 날에 맥주를 마셔 버리게 되었다. 목마름이 시원하게 해소되었다. 소금을 뿌려 구운 돼지고기 한 조각과 양배추가 놓인 타파스 한 접시를 폭풍 흡입해 버렸다. 타파스는 원래는 식사 시간 전에 먹는 간소한 음식이기 때문에 양이 작은 편이다. 웨이터의 추천을 받아서 오징어 튀김 요리를 정식으로 시켜서 레몬을 뿌려 먹으며 한 시간 넘게 멍하게 앉아 있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와서는 지친 몸을 더운물이 담긴 욕조에 담갔다. 욕조가 딸린 화장실이 있는 게 너무 감사하게 생각되었다. 욕조에서 몸을 움직였는지, 깜짝 놀라며 잠을 깨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은데, 다행히 밤에 예약해 놓은 플라멩코 공연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한국의 여행 프로그램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동굴 플라멩코 공연을 보기로 했다. 산 중턱의 동굴을 개조하여 플라멩코 공연장을 만든 곳인데, 옛날에는 집시들이 실제로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공연장이 산중턱에 있고, 길도 낯선 밤길이어서 차량픽업 요청을 하였더니, 공연장으로 가는 중에 알람브라 궁전의 경치가 잘 보이는 언덕에 잠시 정차시켜서 동네 구경도 시켜 주었다. 아랍계 스페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달빛 아래의 알람브라 궁전의 야경으로 반대편 언덕에서 촬영함.


플라멩코는 스페인에 온 집시들의 유산이 스페인의 대표 예술이 되었다고 하므로, 집시들과 관련이 깊다. 문화가 그러하듯이 플라멩코도 오랜 기간을 거치며 형성된 예술이므로 여러 시간대와 지역의 다른 문화들이 녹아 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문화와 페니키아 문화, 그리고 인도에서 넘어온 이들(집시의 기원을 인도 북부에서 이동을 시작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집시들의 외모도 인도인을 좀 닮아 있음)이 가져온 동방 문화, 아프리카와 쿠바의 문화(룸바 플라멩코가 대표적인 음악), 프랑스의 볼레로 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동굴에서 본 플라멩코는 공연자와 관중의 거리가 굉장히 가깝다는 것이 특징이다. 기타 연주자 한 명, 가수 한 명, 댄서들 세 명이서 한 시간 동안 플라멩코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동굴 플라멩코는 다른 공연장의 예술가들에 비해서는 약간 투박한 맛이 느껴졌지만, 집시들의 요소를 더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빠르고 강렬한 플라멩코 기타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리면서, 그 위에 가수의 아랍적인 풍이 느껴지는 노래에 맞춰서 댄서들은 슬픈 듯 비장한 듯 보이는 눈빛으로 빠르고 강한 구둣발 소리를 내며 춤을 춘다. 가수와 앉아 있는 다른 댄서들은 손바닥을 쳐서 비트를 만들며 무희의 춤에 맞춰 준다. 손뼉 리듬은 일률적이지 않고 음악과 춤의 전개과정에서 다양하게 바뀌고 있었다. 와인 한잔을 마시며 보는 플라멩코는 더욱 보는 이의 느낌을 쏟아 오르게 하였다.

붉은 와인 한잔, 열정적인 플라멩코가 어우러지면서 그라나다에서의 첫날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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